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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2때 파파이스가 서울각지에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당시 패스트푸드는 KFC랑 맥도날드랑 롯데리아 세 개가 꽉 잡고 있을때였거든요.
근데 파파이스 뻘건 영어 간판이 뭔가 서양스럽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그러니까, 겉으로만 보고 어린마음에 '저긴 존나 고급음식점'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거에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자기 소개팅이 중복으로 겹쳤다며 저보고 대신 나가달라고 했어요.
너무 무섭고 떨렸지만 내색 않고 엄지를 척 올려줍니다. 그때의 저는 비록 가진 건 쥐뿔도 없었지만, 기회란 것이 다가왔을 땐 일단 머리끄댕이를 잡고 늘어져야 함을 아는 영리한 아이였거든요.
다음날, 가진 옷 중 가장 세련되고 깨끗한 옷을 차려입고 명절에 차곡차곡 모아둔 쌈지돈을 챙겨 소개팅 장소에 나갔더니 새침하게 생긴 여자애 하나가 서 있었어요. 그런데 소개팅이란 걸 말만 들었지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 지는 몰랐기 때문에 고민고민 하다가 마침 파파이스 간판을 발견합니다. 당시의 제가 알고 있던 음식점 중에 가장 고급음식점이었죠.
당당하게 파파이스에 들어서서 여자애를 2층에 자리잡으라고 올려보내고 쿨하게 카운터에 한 팔 걸치고 건들건들 하면서 메뉴판를 보고 있었어요.
근데 뒤에서 아가씨 하나가 기다리다가 '지금 주문 안하실거면 비켜줄래요?' 그러길래 뒤로 나와서 팔짱끼고 메뉴를 쭉 탐색했지요
뭐가 뭔지는 하나도 모르겠는데 암튼 닭고기를 조각으로 파니까 양이 적을것 같아서 닭고기랑 버거랑 후렌치 후라이랑 볶음밥이랑 빵이랑 이것저것 막 시켰어요. (세트메뉴 개념도 몰랐음)
4만얼마 나오니까 이미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계산하고 (속으로 고급 음식점이니까 당연하지라고 생각) 뒤에 팔짱끼고 십여 분 기다렸다가 한가득 안고 올라갔더니 여자애가 왜이렇게 늦었냐고 막 뭐라 그러다가 사온걸 보고 놀래는거에요. (속으로 촌스럽긴 여긴 고급음식점의 대명사 파파이스라고 생각)
그러더니 '이걸 누가 다먹으라고?? 야야 종이수저를 여섯개나 줬다 봐라'
그러길래 그제야 엄청 당황해서
'내.. 내가 다 먹지!...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히히'
그러고 먹기 시작했는데 이게 줄지를 않더군요
그래서 여자애 화장실 갔을때 햄버거 포장지에 치킨조각이랑 감자튀김이랑 막 싸서 가방에 넣었는데도 치킨이 막 증식하는 것 같이 보였음.
콜라 리필 그런것도 몰라서 목은 꽉 멕히는데 꾸역꾸역 한시간 넘게 걸려서 다 먹고 나왔는데 도저히 산책을 한다거나 커피숍을 갈 컨디션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집에 가자고 그러니까 여자애가 '뭐 이런 병신이...'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일단 떠밀어서 집에 가는 버스를 같이 탔음.
맨 뒷자석에 둘이 나란히 앉았는데 자꾸 사람들이 흘낏흘낏 쳐다보길래 그제서야 파파이스의 그 독특한 맵고 달큰한 냄새가 목구멍에서 올라오는게 아니라 가방에서 풍기는걸 알았고,
한 마디도 없이 앉아가던 여자애는 내릴데도 한참 남았는데 '먼저 갈께' 그러고 휙 내려버렸음.
그렇게 자는척하고 집까지 가서 가방 열어보니까 포장지 너덜너덜하게 다 풀려서 치킨이랑 감자튀김이랑 책이랑 막 뒤엉켜서 워크맨 이어폰 꽂는 곳에 닭뼈 꽂혀있고, 그중에 가장 멀쩡하게 남은 치킨 조각 잘 털어서 접시에 담아서 안방에 엄마한테 갖다 드리니까
'왜 이렇게 늦게왔니... 밥 해놨는데 이런건 왜 사왔어... '
그러시는데 눈물이 왈칵 났네요
그게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소개팅이었습니다.
출처 | 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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