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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어느 깡촌 작은 회사를 다닌지 2년 째.
드디어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이런 시골에선 보기 힘든 정장과 하이힐, 스타킹과 향수를 사용하는 그녀였죠.
그녀는 보험설계사였습니다.
안 그래도 과도한 자위와 야근으로 생명의 불꽃이 미미해져감을 느껴, 내 죽더라도 효도 한 번 하자는 생각으로 보험사에 연락을 했습니다.
그날 저녁 달려온 그녀가 내준 견적을 인터넷에 물어본 결과 썩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는 답을 들었지만 저는 그 자리에서 쉽게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서명을 하는 그 순간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 테니까요.
다시 생각해보겠다며 퇴짜를 놓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녀가 과일을 한바구니 사들고 왔더군요.
눈물이 날것만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여자에게 그런 선물을 받아본 적 없었거든요
과일을 본 순간 직원들이 멧돼지처럼 달려들어 과일을 먹어치우는데, 그들이 베어 무는 사과조각이, 거칠게 벗겨내는 귤껍질이 마치 그녀의 살과 옷자락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결국 치사하다는 험담들을 뒤로 하며 남은 과일들을 품에 꼭 안아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다음 주에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사왔고
그 다음 주에는 영양제를 사들고 왔습니다.
단순히 고객에게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분명 그녀도 도시 출신인 나를 한 남자로 느끼는 게 당연했고, 때문에 저는 사인할 듯 말듯 하며 그녀를 애태웠습니다.
그것이 내가,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업무에 방해가 될 정도로 하루에 너댓 번씩 내게 전화를 했고, 그녀가 날 얼마나 갈구하는지 잘 알았지만 쉬운 남자가 될 수는 없어 번번이 만나자는 약속을 거절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멋들어지게 사인을 휘갈긴 후, 사인란 밑에 한 달 동안 궁리한 멋진 문구를 남기기로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그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그대의 불기둥이 되어 영원히 타오를 테니 나의 영원한 불구덩이가 되어주오’
12월 17일 월요일
그녀가 예고도 없이 회사로 찾아왔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런 방문이라 커피를 타는 내 손이 다 떨리더군요.
“벌써 세 달이 지났어요.
진짜 고객님 같은 분도 처음이네요.
내년 1월 1일부로 고혈압과 당뇨가 약관에서 빠지거든요?
거기다 나이 때문에 보험료도 올라요. 늦어봤자 손해 보는 건 고객님뿐이에요 오늘 결정을 내려주세요!”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억누르며 최대한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그녀의 속내를 떠봅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정말 빨리 들어야겠군요.
오늘은 좀 무리고 24일 저녁에 찾아오시면 확실히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그 날은 일하지 않는데요...”
“뭐 약속 있으세요?”
“네 딸아이랑 온천 가기로 했어요”
“결혼 하셨어요?...”
“아이 참, 다들 그렇게 물어보는데 호호호호 딸애가 중1이에요”
순간 흐릿하게만 보였던 그녀가 점점 선명해지면서 부드럽던 눈매의 주름이 하나 둘씩 드러나고,
말끔하던 입가에는 번진 립스틱과 잔주름이 또렷하게
새하얗기만 하던 치아는 치석과 립스틱 묻은 자국이
곱디 곱던 손등은 하얀 때비듬이 내려 앉아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사인을 끝낸 서류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더군요... 마지막 운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듯 무의식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월급 90만원인 제가 19만 원짜리 종신보험을 드는 건 좀 무리가 아닐까요?”
3개월 내내 내게 환한 웃음을 내려주던 그녀가 무표정한 표정으로 “글쎄요?”라는 말을 짧게 내뱉는 순간 그녀와 나를 연결해주던 운명의 끈이 '톡'하고 끊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떠나갔습니다.
앞으로 20년간
매달 10일이 되면
통장에서 19만원이 인출되었다는 문자를 받으며
그녀를 추억하겠죠.
안녕 내 사랑.
출처 | 과거의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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