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서양의 폴로(polo)와 비슷해 보이는데요. 체스가 그랬듯 페르시아, 인도에서 시작돼 서양과 동양으로 각기 퍼진 것으로 보입니다. 태왕사신기에도 이런 격구 장면이 보이죠. 말로 하키하듯이 공을 쳐서 상대의 골대에 집어넣는 것이요. 삼국은 물론 발해, 고려, 조선에서도 이어진 듯 합니다.
최우는 이 격구를 정말 좋아해서 1229년에는 민가 100여호를 헐고 격구장을 만듭니다. 이 근처의 주민들은 집을 잃은 것은 물론이요 격구장에 먼지가 가득해 물을 떠 뿌리는 일에 동원되었죠.
이런 가운데서 몽고는 계속 공물을 요구했고, 동진은 몽고에서 벗어나 고려와의 연대를 꾀했으며, 왜구는 심심하면 남부지방을 침략하고 있었습니다.
2. 몽고와 동진
몽고가 세운 원 제국의 역사에서 야율초재의 비중은 어마어마합니다. 금나라에 지배당한 거란 황족의 후예로서 그는 약탈밖에 몰랐던 몽고를 정주민족화, 혹은 중국화 시킨 인물이었죠. 그는 세금을 받는 것도 몰랐던 듣보잡 몽고인에게 세금 받는 법을 알려줬고, 이런저런 통치의 기본을 확립했습니다. 금을 칠 때도 무조건적인 학살보다는 그들의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이게 했죠. 그가 없는 상황에서 몽고가 계속 성장했다면 유라시아에는 농경문명이 아예 없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 그걸 기반으로 한 대체역사물도 있구요. 반면 몽고가 요, 금에서 이런저런 기술을 흡수할 수 없었다면 그런 거대한 제국을 이루진 못 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초원에서 약탈하던 실력으로는 남송부터 고려까지도 제대로 공격하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뭐 이렇게 배운 세금 걷고 하는 기술이 아직 서툴러서 -_-; 무자비한 세금과 공물을 요구했고, 고려는 물론 곳곳에서 반항을 겪게 되는 이유가 됐지만요.
칭기즈 칸이 죽고 난 후 칸이 된 오고타이는 금나라에 대한 작전을 지속합니다. 황하 이남에서 버티던 금은 개봉부로 수도로 옮긴 후 여전히 30만의 대병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맞서는 몽고군은 10만 정도였죠. 1232년, 툴루이가 이끄는 3만이 완안합달이 이끄는 금군 15만을 전멸시키며 금은 멸망의 길을 걷습니다. 1233년 5월, 개봉이 함락되면서 금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죠.
그 동안 만주에서는 포선만노의 동진국과 여진의 잔당 우가하, 가불애 등이 할거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동진국은 이름을 동하국으로 바꾸면서 몽고를 배반, 고려에 협조를 구하고 있었죠. 한편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 혼란이 지속되었고, 기껏 세운 미나모토씨의 대가 끊겼습니다. -_-; 겐지가 헤이케를 없애고 세운 가마쿠라 막부였지만 이후의 실권은 후지와라씨에서 호조 씨로 완전히 옮겨갑니다. 그나마 최우가 한 거라곤 일본에 항의해 왜구를 끊은 것 정도였죠. 그 이후에도 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고려 말이나 조선 중기에 비하면 피해가 없다시피 했죠.
몽고에서는 금을 치는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공물을 요구합니다. 대충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금, 은과 의복 + 말 2만 필 못 해도 말 1만 필
- 몽고 1백만 대군의 의복을 고려에서 만들어 줄 것
- 2만 매의 수달 가죽, 명주 3000필, 모시 2000필, 면화 1만근, 먹 천 개, 붓 200개, 종이 10만장, 자초 5근, 홍화, 남순, 주홍 각 50근, 자황, 광칠, 오동나무기름 각 10근 기타 등등등등
- 몽고 황제, 대왕, 모든 군주 등 남자 1천명과 대관 등에 귀녀를 보내고 고려 태자, 장수, 대왕의 자제들도 남녀 각 1천명씩 황제에게 보낼 것
... -_-;
이런 가운데서 동진에서는 칭기즈 칸의 서하 원정을 핑계로 몽고와 연락을 끊은 후 고려에 동맹을 청합니다. 고려에서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자 군사행동을 병행했죠. 한편 우가하는 고려에서는 몽고군의 옷을 입고, 만주에서는 고려군의 옷을 입고 마구 약탈을 하고 다녔습니다. 결국 1226년 김희제가 독단으로 압록강을 건너 우가하를 소탕하기에 이릅니다. 이 김희제는 다음 해에 역모에 휘말려 최우에게 죽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 사신 저고여 암살입니다.
1224년 1월, 저고여는 고려에 들어옵니다. 이번에도 공물을 바치라는 것이었지만 고려에서는 미온적으로 행동했고, 그는 아무데나 활을 쏘고 사람을 마구 때리고 다녔다 합니다. 이에 낭중 최홍이 역관문을 잠궈 버리죠. -_-; 김희제가 저고여를 이리저리 달래니 별 일은 없었죠. 그가 고려에 들어올 때 동진에서 이간책으로 "고려가 몽고를 배반했다"고 하기도 한 상황이었습니다.
다음 해까지 저고여는 이런저런 꼬장만 부리며 나가지 않았고, 그런 가운데서도 몽고의 사신은 계속 들어왔습니다. 이들을 접대하는 비용만 해도 엄청나게 나갔고, 맘에 들지 않는다고 왕 앞에서 고려를 모욕하는가 하면 돌아가는 길에 명주와 삼베는 버리고 가는 길까지 일어났죠.
그런 가운데 1225년 1월, 돌아가던 저고여가 죽는 일이 벌어집니다.
고려사에서는 이를 동진의 포선만노가 계획한 것으로 적고 있고, 애초에 "도적이 죽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누가 했을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직 토벌되지 않은 우가하도 있고, 동진 역시 유력한 용의자죠. 특히 동진의 경우 몽고와 고려를 이간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방법이었습니다. 고려도 몽고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서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전면전 벌일 생각도 없으면서 이랬을까 싶긴 합니다만...
이 일로 몽고는 한동안 고려에 국교를 완전히 끊습니다. 당면한 금나라 원정에 온 힘을 쏟고 있었죠. 칭기즈 칸 사후, 툴루이가 임시로 통치하는 기간이 지나고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칸이 됩니다. 이렇게 몽고는 서방의 차가타이, 동방의 테무게 웃치긴(칭기즈 칸의 막내 동생), 중앙의 오고타이 칸의 삼두 체제가 이루어집니다.
금이 멸망의 길로 가던 1231년, 오고타이는 북중국을 치던 4군 3만명을 요동으로 돌립니다. 요동에 남아 있던 금의 잔당과 고려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합니다. 그들을 이끈 장수는 살리타, 그는 권황제로 이 지역을 점령한 후 황제의 대리로 통치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압록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가불애를 토벌한 후 곧 압록강을 건넙니다.
고려에서는 아직껏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죠. 8월, 마침내 몽고의 1차 침략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