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 날씨를 만끽할 틈도 없이 봄의 끝자락 5월이 왔습니다. 해마다 이 달이 되면 주말마다 있는 결혼식 소식으로 더 바빠집니다. 화사한 봄 날씨와 어울리는 어여쁜 5월의 신부 모습은 그 풍경만큼이나 낭만적이라서 일까요? 하지만 막 결혼식을 마친 행복한 부부가 신혼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보며, 저는 매번 다른 생각에 빠져들게 됩니다.

응급실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그동안, 이 이야기를 꺼내도 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실 응급실에서 있었던 환자들의 이야기를 모두 적어나갈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이는 이 이야기 하나하나가 어떤 분께는 고통의 경험일 것이고 따라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그분 또는 가족에게 그 고통을 다시 경험하게 만드는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글을 쓰긴 하지만, 매번 글을 쓸 때마다 마음 한편엔 비슷한 경험을 가진 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벌써 8년 전 이야기네요. 저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마치고 인도네시아 발리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수련의였던 시기에 결혼하느라 결혼식 포함 1주일간의 휴가만을 받았기 때문에 5일 만의 짧은 여행을 다녀와야 했습니다. 짧기도 짧았지만 예쁜 신부와 함께 추억을 만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휴가기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여행은 한국에서 신혼여행 온 커플들을 몇몇 묶어 함께 단체관광을 해주는 여행이었습니다. 발리의 공항에 도착해 한국인 커플끼리 팀을 이뤄 세 커플이 함께 여행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날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같은 시기에 결혼을 한 인연을 얘기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중 한 커플은 저희와 동갑인데다 같은 도시에서 지내는 분들이라 더 반가웠습니다.

짧지만 행복한 신혼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짧은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신혼의 여유는 뒤로 한 채, 다시 응급실에서의 정신없는 일상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어느덧 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이 지났고 저는 응급실 근무를 마치고 새로운 스케줄인 응급의학과 중환자실 주치의를 맡게 되었습니다.

응급실에서 진료를 마치고 중환자실로 올라와 응급의학과 주치의가 진료를 보게 되는 환자는 보통 세 가지 경우로 압축됩니다. 교통사고나 낙상으로 다쳐서 흉부를 포함한 전신 손상을 입은 다발성 외상환자의 경우, 약을 먹거나 목을 매는 등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여 중환자실 치료가 필요한 경우, 그리고 갑작스런 심장마비에 빠른 심폐소생술을 통해 심박동이 돌아왔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저체온 치료가 필요한 경우입니다.

중환자실 주치의로 한 주정도 시간이 지나 복잡한 중환자실 오더에 어느덧 적응이 되어갈 무렵, 응급실에서 입원시킬 환자가 있다며 새로운 환자를 인계받으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응급실에서 치료를 맡았던 동료의 인계 내용은 20대 중반 남성이 특별한 외상없이 갑자기 쓰러져 119에서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응급실에 도착했고 응급실에서만 40분, 현장에서부터는 한 시간에 가까운 심폐소생술을 하여 지금 막 심박동이 돌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심폐소생술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난 경우는 심장 기능이 돌아오더라도 저산소성 뇌손상이 심해 뇌사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 무의미한 심폐소생술을 중지하고 사망 선언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엔 워낙 젊은 사람이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왔으니 포기하지 말고 좀 더 해보자 하여 심폐소생술을 지속하다 심박동이 돌아온 모양이었습니다. 오랜 심폐소생술 동안 들어간 많은 수액으로 얼굴은 심하게 부어있었고 손발은 차가워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어렵게 심장 기능이 돌아온 직후 확인한 환자의 머리 CT 결과는 약간의 뇌부종만 보였습니다. 약물이나 외상의 상황도 아니고, 심근경색이나 뇌출혈의 증거도 없이, 젊은이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심정지... 아무래도 부정맥 등 심장 원인에 의한 심정지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응급실 의료진들은 환자의 젊은 나이 하나에 한줄기 희망을 걸고 환자의 체온을 강제로 34도로 낮춰 뇌부종과 뇌 손상을 최소화하는 저체온 치료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응급실에서 나온 검사 결과들을 확인하고 앞으로 환자의 치료를 맡게 될 주치의로서 입원 설명을 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환자 가족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 어렵게 심장 기능이 돌아왔지만 큰 기대는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임을 설명했습니다. 환자 부모님은 앞날 창창하고 결혼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아들이라며 눈시울을 붉히며 적극적인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저체온 치료의 시작을 위해 보호자의 동의를 받고 나서 중환자실로 옮겨진 환자는 동공 반응, 자가호흡이 없는 좋지 않은 상태에서 뇌부종을 줄이는 약물치료와 수액 치료를 시작했고 혈압이 낮아 바로 시작하지 못했던 저체온 치료는 다행히 강심제를 사용하면서 혈압이 올라 그날 밤부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환자의 젊은 나이 하나에 한줄기 희망을 걸고 저체온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저체온 치료를 시작하고 다음날 아침, 회진 준비를 하면서 환자를 확인하던 중 느리지만 약간 동공 반응이 돌아온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동공 반응이 생겼다는 것은 뇌압이 떨어지고 뇌부종이 좀 풀려가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저 또한 희망을 가지고 세심하게 치료를 지속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그 다음날이 되니 동공 반응이 없어지며 다시 동공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뇌부종이 악화되면서 뇌압 상승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은 상태입니다. 다시 촬영한 머리 CT 결과도 같은 내용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이후 진행된, 환자에게 최소한의 뇌 기능이 남아있는지 확인하는 뇌간반응 검사는 모두 반응이 없었고 뇌파검사는 매우 약한 뇌파 소견을 보이고 있어 곧 뇌사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되면 환자가 다시 깨어날 가능성은 없는 상황입니다. 의료진으로서는 보호자께 차선책을 얘기해야 하는 힘든 순간이 왔습니다.

면회를 오신 환자 가족들께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하고 환자분이 혹시 평소 장기기증에 대한 뜻을 표현한 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환자 아버지는 절대 그런 일은 없다며 제 손을 꼭 붙들고 제발 아들 좀 살려달라며 눈물을 흘리시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너무도 잔인한 질문이었겠지요. 그러면서 아버지는 제게 아들의 평소 모습에 대해 한참을 넋두리하듯 쏟아내셨습니다. 어렸을 때 이야기부터 최근 결혼을 하면서 아이가 행복해했다는 얘기까지.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저와 비슷한 나이에다 같은 시기에 결혼도 하고, 결혼 때문에 집에 손 벌리기 싫어해서 돈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는 것까지, 환자에게서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환자 부모님께 너무도 잔인한 질문을 해야 했습니다

그 날 저녁, 환자의 부인이 주치의인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간호사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아는 분인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때까지는 보호자 중 한 사람으로 얼핏 지나가기만 해서 그런지 누구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부인을 만나 얘기를 듣고 보니 그제야 한 달 전, 발리에서의 신혼여행에서 만났던 커플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아... 이런 운명의 장난이 있단 말입니까? 머리가 멍해지는 듯했습니다. 신혼여행에서의 인연이 겨우 한 달 남짓 뒤에 이렇게 주치의와 보호자의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요. 게다가 환자의 상태는 이렇게 절망적인데 말입니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그 자리 그 상황에서는 당황한 모습을 보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그랬던 것처럼, 남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아 그때 그분이시군요, 환자 상태가 좋지 않아 유감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섭섭하셨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차마 경과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부인을 만나 따로 인사할 용기를 내지 못한 저는, 이후 중환자실 주치의를 마치고 응급실 당직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정신없는 응급실 당직 스케줄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그동안 가족들의 눈물 속에 겨우겨우 생명의 끈을 이어가던 환자는 제 손을 떠난 며칠 뒤, 제게 왔을 때처럼 그렇게 다시 심장이 멈췄고, 그렇게 그는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봄을 맞아 화려한 꽃들의 환영을 받으며 신혼여행을 가는 행복한 커플들을 보고 있으면 전, 저와 비슷한 것이 참 많았던, 친구 같았던 그 환자와 부인의 슬픈 눈물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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