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킬미힐미] 팬픽으로 쓴 것으로 드라마 내용을 모르시면 다소 이해가 어려울수 있습니다.
드라마를 먼저 보시고 읽으시길 권합니다.
겨울 벚꽃
1.
21년동안 잠든 사이ㅡ 세상은 너무나 변해있었다.
익숙한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낯선 공간에 억지로 떨어진 기분.
갑자기 나이가 들어보이게 되신 어머님은 그저 눈을 뜬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천천히 적응해가라고 하셨지만 30대의 영혼을 잡아뜯어
50대의 몸에 억지로 밀어넣는 것처럼 어색한 것이 어디 있을까.
모든 것이 없어진 지금 남아있는 건 그저 내 이름 석자 차준표라는 것 뿐.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 어느새 하얗게 서린 머리와 주름진 얼굴만큼이나 비참한 건
하나뿐인 아들이 민서연이 남긴 딸 아이의 이름으로 살고 있고
그 여자아이에게 지독한 짓을 한 나에겐 지난 과오에 대한 사죄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는 것.
무엇을 위해 나는 그 오랜 세월을 숨만 쉰 채 살아온 것일까.
앞으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그 작고 어렸던 여자아이에게
나로 인해 마음이 여러조각 나눠진 내 아들에겐
나는 어떻게 사죄를 해야한다는 말인가.
무엇으로 보상해줘야 한단 말인가.
나의 이런 고민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계절은 지나갔다.
몇 년 간의 오랜 재활 치료가 마무리될 무렵 나는 본가에 머물기를 원하시는 어머님의
부탁을 거절하고 경기도에 있느 작은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치료 목적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본가에 머물던 시기마다 화란이의 작전인지
몇번인가 우연히 그 아이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어깨를 움찔하며
입술을 질근 깨무는 그 아이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기에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처음 신세기라는 아들의 인격을 만났을때 하루라도 빨리 죽어버리라고 으르렁대던 아들은
여전히 써늘한 표정이었지만 리진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그 아이가 중간에 무슨 얘기를 해줬는지
이곳으로 이사한다는 내 말에 잘지내라며 마지못해 내밷는 얼굴에서
20여년전 나에게 배를 사주겠다며 환히 웃던 아들의 얼굴이 겹쳐져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벚꽃이 조금씩 피려던 4월의 어느 날,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화재가 나기 전 쓰고 있던 개인 물품들이 배달되어 있었다.
화마를 면한 물건들의 상태는 꽤 깨끗한 상태였는데 의식이 잃기 전 쓰던 물건을을 보면
그 동안 의식의 공백기를 어느 정도 메우는 데에 도움이 될거라는 의사의 조언을
어머님이 들으신 것이리라.
그런데 먼지가 쌓인 상자들을 열어보다가 문득 아주 오래된 물건 하나를 찾아냈다.
얼마나 만졌는지 손때가 묻어있는 작은 펜던트.
벚꽃모양의 틀에 박혀 있는 투명한 다이아가 24년이나 지금이나 상관없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뇌리에 박힌듯 새겨지는 기억 한 조각처럼.
마치 파노라마처럼 기억이 새록새록 펼쳐지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없는 파란 하늘 아래 그저 벚꽃만이 가득차 하얀 색으로 빛나던 오후.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우며 날 바라보던 한 여자.
그리고 그런 그녀를 쏙 빼닮은 한 여자아이.
나는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왜 눈을 떴는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해야할 마지막 일이 무엇인지.
"거절합니다. 거절은 거절합니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 젊은 남자는 방금 내게
물을 끼얹은 아버지를 많이 닮은 듯 했다.
모든 진실을 다 알게 된 그 아이의 양부모님들에게 홀대를 받을 건 예상하고 갔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물을 끼얹고 단칼에 내쫓는 모습에서 이들이 그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며 키웠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도 원래 그러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다짜고짜 물부터 부어버리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버렸다며 툴툴대며 타올을 주는 이 남자는 그 아이의 쌍둥이 오빠이자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 오메가로도 알려져 있었다.
"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 내용을 토대로 소설을 썼습니다. 이미 드라마와
영화화까지 되었구요, 그런데 이제와서 제가 가해자였던 당신을 위해 글을 쓰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는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의 영혼을
파괴해버린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그가 필요했다.
"그렇게 때문에 더욱 부탁하는 겁니다. 오리온씨. 도... 아니, 리진 양의 친엄마인
민서연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리고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지 알수 있는 사람은
이제 저 하나입니다. 그러니 나는 그 아이에게 모든 걸 알려줘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걱정마세요. 이 일이 끝나면 이제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
"잔인한 부탁을 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내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이상,
모든 걸 기록하고 정리해줄 사람은 오리온씨, 당신밖에 없습니다."
파킨슨 병.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나에게 찾아온 심판 같은 이 병이 내 기억을
모조리 갉아먹기 전에 민서연. 그 여자에 대한 모든 기억을 그 아이에게 전해주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의무이자 속죄였다.
시선도 외면한 채 침묵을 지키는 그를 남기고 역시 안되는 건가 싶어 돌아서려는데
오랜 침묵 끝에 꾹 참고 있는듯 쥐어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민서연씨는.. 어떤 사람 이었습니까?"
민서연.
그 여자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떨까.
겨울 벚꽃 같은 여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더욱 신비한 미소를 가졌던 여자.
[계속]
=============================
총 5부작입니다.
반응이 괜찮다면 2부도 올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