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병장을 달고 윗 고참들이 하나 둘 전역해 어느새 내가 소대 왕고가 되었을 무렵. 나는 지루함에 몸서리 치고 있었다. </p><p>당시 내가 근무하던 곳은 해안독립초소였고 그 때 군대에는 지금처럼 컴퓨터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없었고 운동을 할만한 </p><p>연병장도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휴게소에 있는 책을 읽는 것 뿐이었다. 그나마 휴게실에 있던 책들도 전투교범이나 </p><p>샘터, 리더스다이제스트 <암을 이겨낸 발레리나>, <불곰과 사투를 벌이고 살아남은 레슬링 은메달리스트>정도가 고작 이었다.</p><p>그런 우리가 불쌍했는지 보급관님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만화책을 잔뜩 구해와 비치해두었고 그 중 하나가 북두의 권이었다.</p><p>오랜만의 문화생활에 들뜬 우리는 성경책을 읽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책을 읽기 시작했고 책을 정독한 후 우리는 모두 그 뜨거움과 </p><p>남자다움에 매료되어 북두의 권 매니아가 되었고 내무실에선 언제나 아다다다하는 괴성이 멈출날이 없었다.</p><p><br></p><p>그러던 어느날 이었다. 소대에 새로 신병이 도착했고 내무실에 누워있던 나는 문 밖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후임 하나가 </p><p>내무실로 뛰어들어와 나에게 그분이 오셨다고 말을 건냈다. 뭔말인가 싶어 왜그러냐고 물어봤지만 그 후임은 다짜고짜 날 붙잡고 나가기</p><p>시작했다. 별 일 아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내무실 밖을 나섰고 그 후임이 가리키는 곳엔 긴장한 얼굴의 신병이 앉아있었다.</p><p>신병 처음 보냐고 한소리 하려던 찰나에 그 이등병의 이름표를 보게 되었고 나는 내 전투복 하의가 뜨뜻해짐을 느꼇다. </p><p>그 이등병의 성은 권이었고 이름은 왕이었다. 권왕이 우리 소대에 들어오다니! 우리는 모두 경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권왕은 </p><p>이 미친놈들은 도대체 왜이러는건가 하는 눈빛으로 겁에질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불현듯 정신을 차린 나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p><p>후임들에게 어서 권왕을 모시지 않고 뭣들하는 거냐고 일갈했고 그는 우리부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마를 타고 내무실에 </p><p>들어가고 선임병의 등을 밟고 침상에 올라간 최초의 이등병이 되었다. </p><p><br></p><p>자리를 잡고 앉은 뒤 우리는 미친듯이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세기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가족 중 남자형제는 몇명인가?"</p><p>"정말 니 생애 한점 후회는 없는가?" "가슴에 일곱개의 상처를 가진 남자를 아는가?" 우리의 초롱초롱한 눈을 바라보면서 권왕은 이제 </p><p>긴장을 넘어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입오자마자 그는 부대 내 최고의 인기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 전설은 </p><p>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p><p><br></p><p>권왕이 전입온 지 이주 정도가 지난 날 부대 내 상수도가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상수도 관을 고치기 위해 우리는 땅을 파야했고 한 겨울에 물까지 새서 꽁꽁 얼어 붙을 땅을 파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다들 달라붙어 땀을 뻘뻘 흘리며 땅을 파기 시작했고 아직</p><p>대기기간이라 지켜만 보던 권왕은 눈치가 보였는지 자기도 일을 하겠다며 나섰다. 우리는 권왕이라면 맨손으로 얼어붙은 땅을 푹푹 </p><p>파낼수 있을거란 기대를 하며 그를 지켜보았지만 권왕은 곡괭이를 주워들었다. 왠지모를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리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고</p><p>얼마 지나지 않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깜짝놀라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니 그 곳엔 권왕이 다리를 붙잡고 쓰러져 있었다. 곡괭이질을 하다가 곡괭이를 놓쳐 땅 대신 지 발목을 찍어버린 것이었다. 다행히 뼈에 큰 이상은 없었지만 치료를 위해 수통과 사제병원을 왔다갔다 해야했고 그 사이 나는 전역을 했다. 그렇게 세기말 패자의 전설은 곡괭이질 한방에 끝이 나고야 말았다.</p><p><br></p><p><br></p><p><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