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r></p><p>우리부대는 시설이 매우 낙후된 편이었다. 당연히 사병들이 여가시간을 보낼만한 장소나 도구도 마땅치 않았다. </p><p>나는 싸지방이라는걸 제대한 후 몇년이 지나서야 처음 들어봤을 정도였다. 왠지 음란해보이는 단어에 설레여했지만</p><p>싸이버지식방이라는걸 알고 적잖은 실망을 하기도 했다. 그날도 내무실을 굴러다니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을때 </p><p>휴게실에 당구대 하나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학 시절 당구에 푹 빠져 입대 전까지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한 </p><p>나는 벌떡 일어나 휴게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직접 본 당구대는 나의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p><p><br></p><p>언제 생산된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빠진 당구대였다. 여기저기 헤진데다 곳곳에 뚤린 구멍까지.. </p><p>겉으로 봤을때는 단군 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가 동굴 안에서 생마늘을 씹으며 죽빵을 쳤을것 같은 그런 당구대였다.</p><p>거기에 광채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무광에 금까지 간 당구공과 활처럼 휜 큐대까지... 실망이 컸지만 그래도 쳐보면 </p><p>할만 하겠지 라는 생각에 큐대를 잡았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였다. 첫 샷을 날리고 나서 나는 인디아나존스 1탄의 </p><p>오프닝 시퀀스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쿵쿵쿵하는 바윗돌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게다가 </p><p>곳곳에 있는 파인자국 때문에 공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지 멋대로 굴러갔다. 거기다 다리가 짝이 안맞는지 서있는 상태에서</p><p>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공이 지 혼자 슬금슬금 굴러가는 자체시간제한 시스템까지.. 도저히 제대로 된 당구를 칠 수 있을것 </p><p>같지 않았다. </p><p><br></p><p>하지만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었다. 몇 번 치다보니 어느새 이 말도 안되는 당구대에 적응할 수 있엇다. 계속 치다보니 </p><p>어느 순간부터 그린을 읽듯 당구대의 결을 읽을수가 있었고 수많은 삑사리 끝에 어느정도 공을 원하는 방향으로 보낼 수 있게 </p><p>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적응해 가며 진짜 당구같은 모습을 갖춰갔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p><p>후임과 담배내기 당구를 치고 있을 때였다. 게임은 점점 절정으로 치달았고 마지막 한점이면 내가 승리를 쟁취할 참이었다. </p><p>신중하게 자세를 취하고 그동안 수없이 해왔던 pri훈련을 떠올리며 숨을 멈추고 큐대를 내질렀다. 그 순간이었다. </p><p>나에게 나인볼황제 용소야의 기운이 강림했는지 당구공은 당구대를 떠나 허공으로 날아갔고 그대로 계단 모서리에 부딪혀</p><p>깨져버리고 말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p><p><br></p><p>졸지에 모두의 즐거움을 앗아가버린 나는 비난여론에 휩싸였고 대안을 찾기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바닥에</p><p>널부러져 있던 큐대를 보고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바로 자치기였다. 지금생각해보면 병신같기 그지없는 아이디어</p><p>였지만 절박했던 나에게는 참신한 아이디어로 느껴졌다. 더 이해할 수 없는건 나의 이 말도안되는 제안에 환호하며 찬사를</p><p>보낸 동료들이었다. 아마도 그때에는 모두들 지루함에 미쳐 제정신이 아니었던게 분명했다. 큐대를 잘라서 적당한 크기의</p><p>막대기를 만들고 우리는 내무실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한가지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건 바로 아무도 자치기위 룰을 </p><p>모른다는 것이었다.. </p><p><br></p><p>한참을 고심한 끝에 우리는 서로 아는정보를 종합해 새로운 룰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대부분 아는게 없어 결국은 야구와 자치기가</p><p>반반씩 섞인 괴이한 룰을 가진 게임이 탄생했다. 그리곤 이 게임의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구? 야치기?</p><p>하지만 입에 착 달라붙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고 우리는 일단 게임을 해보기로 했다. 첫번째 선수로 나선 나는 바닥에 </p><p>놓인 막대기를 향해 방망이를 내려쳤다. 하지만 나의 습자지같은 과학지식은 큰 화를 불러왔다. 바닥에 놓인 </p><p>막대기는 수직으로 솟구치는게 아니라 내 몸쪽을 향해 솟구쳤고 그대로 나의 소중한 드래곤볼을 직격했다. 그것도 세로로. </p><p>숨을 쉴수 없는 고통에 그대로 무릎 꿇었지만 동료들이 엉덩이를 쳐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의 희생으로 </p><p>바닥에 막대기를 놓고 치는게 아니라 손에 들고 치는걸로 룰이 규정됐고 나는 수비위치로 들어섰다. 그렇게 한참을 게임을 </p><p>하다가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게되었다. 그건 이 획기적인 게임이 생각보다 드럽게 재미가 없다는 점이었다. 막대기를 치고</p><p>줍고 치고 줍고의 단순한 반복이니 어찌하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마치 내가 개가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누구하나 섣불리</p><p>재미없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지루한 게임을 이어가던 중 후임이 날린 막대기가 나의 소중한 이성구를 다시한번 직격하는</p><p>사건이 일어나고서야 이 지루한 게임의 막을 내릴수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정해진 이 게임의 정식명칭은 '잦치기' 였다.</p><p>물론 그날 이후로 다시는 이 게임을 하는 일은 없었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