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그렇게 믿고 있다.
얼었던 세상이 녹으면 젖은 대지 위에 꽃이 피고 따스한 바람에 잎사귀가 달린다. 들에는 풀내음이 가득하고 앙상했던 가지는 초록빛 잎사귀로 빛이 난다. 뺨을 간질이는 햇살에 절로 미소가 생기고, 햇볕은 세상에 색깔을 입힌다.
그런 봄날이 지나면 언젠가 여름이 오리라는 걸 믿고 있다.
따스해지던 태양이 점점 뜨거워지고, 가끔은 세상을 식히는 빗줄기에 반가워하고, 무성해진 숲의 녹음에 취하고, 한 걸음 내딛기 힘든 더위에 숨이 막히는 여름이 오리라는 걸 믿고 있었다. 꼭 그래야만 했다. 들에 곡식이 무르익으며 밭에 과실이 열매를 맺고, 때로는 거친 태풍에 힘겨워하며 대지를 녹일 것 같은 더위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는 가로수 그늘에 고마워하고 시원한 물 한잔에 행복을 느끼며, 한여름의 더위보다 더 뜨거운 사랑도 하고 슬픈 이별에 뜨거워진 심장을 식힐 줄도 알아야 했다.
그런 여름이 와야만 했다.
한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자주 느껴지는 한 녀석의 시선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면, 녀석이 그 소녀를 바라보다 놀라 고개를 돌리곤 했었다. 그 소녀는 그 녀석이 자신에게 곧 고백을 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소녀는 녀석이 고백하면 상처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잘 모른다고 얘기해줄 생각도 했다. 그 녀석이 고백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상상해두고 있었다. 이미 녀석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망하는 녀석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소녀는 그렇게 소년의 마음을 붙잡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한 소년이 있다. 녀석은 유치원부터 계속해서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동네 여자애가 있었다. 어릴 때는 여자애랑 다닌다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 귀찮기도 했었고, 머리가 굵어지며 괜히 부끄러워 그 애를 피하기도 했었다.
평소와 같이 학교를 가려고 집을 나서다 마주친 그 여자애가, 우산은 챙겼냐고 물어보고 달아나듯 앞서 갔었다. 소년에게 키가 많이 커졌다며 올려다보고 웃었다. 친구들과 있으면 눈으로만 아는 척 인사해줬었다. 그런 그 여자애에게 이제는 손을 들어 먼저 인사하기로 했었다. 다른 애들이 놀려도 좋으니, 이제는 반갑게 인사하기로 마음먹었었다. 그 여자애와 더 가까워지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한 소녀가 있다. 자율학습을 마치면 밤늦게 독서실에 들리는 걸 아빠가 싫어했었다. 집에서보다는 독서실에서 공부가 더 잘된다며 아빠에게 화를 내고 독서실에 갔었다. 매일 밤늦게 독서실에서 돌아오면 마중을 나오셔서 친구들과 수다 떨지 못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게 싫었었다.
독서실에서 지나다 가끔 아는 척하던 애들이 함께 술을 마시자고 했었다. 남자애들하고도 어울리자고 꼬드겼었다. 더 이상 독서실에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 출근하셔야 하는 아빠가 조금이라도 일찍 주무시게, 이제는 집에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한 소년이 있다. 학습지를 산다고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 돈으로 pc방을 들렀었다. 주말에는 근처 도서관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었다.
체육대회 때문에 자율학습이 없어서 집에 일찍 돌아가다, 동네 음식점에서 불판을 닦고 계시는 엄마를 보고 모른 척 했었다. 그 소년은 집에서 엄마를 기다렸지만, 엄마는 소년이 평소 자율학습이 끝나고 돌아오는 시간이 다 돼서야 돌아오셨다. 먼저 와 있는 아들에게 저녁을 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엄마에게, 소년은 이제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한 소녀가 있다. 소녀는 중학교 시절 예쁜 얼굴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뒤늦게 철이 들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어도 기초가 부족해서 쉽지 않았었다. 다른 애들에게 창피해서 기초적인 학습지를 숨기고 다녔었다.
다른 공부 잘하는 친구들처럼 의사, 판사가 되는 꿈을 꾸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소녀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좋은 시절을 자신처럼 방황하는 아이들이 없게 이끌고 싶은 꿈이 있었다. 소녀는 자라서 좋은 선생님이 되고 좋은 남편을 만나 아이들을 괜찮은 길로 이끌고 싶었다.
한 소년이 있다. 싸움을 잘해서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던 소년이었다. 학교에 가면 오늘은 누가 시비를 걸어올지 고민하고, 누구에게 시비를 걸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지 생각하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친구인줄 알았던 녀석들이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마음이 변했다. 다른 아이들은 서로의 고민들을 나누는데, 자신에게는 친구들이 그러지 못한다는 걸 알고 변하기로 마음먹었었다. 항상 자신에게는 듣기 좋은 얘기들만 하는 친구들에게 미안해졌다. 그 친구들 중에 한명이라도 진짜 친구를 만들고 싶었다. 함께 미래를 걱정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한 소년이 있다. 그리고 또 한 소녀가 있다. 또 다른 소년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소녀가 있다.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이 만들어야했을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다.
멍청한 녀석의 바보 같은 여자친구가 될 수 있었을 소녀가 있었고, 첫사랑에 마음 아파할 소년이 있었다. 아빠와 화해해야할 소녀가 있었고, 엄마를 위로해야할 소년이 있었다. 꿈 많은 소녀가 있었고, 괜찮은 어른이 되어야할 소년이 있었다.
세상의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그들에게 여름이 오지 않았다. 봄날의 끝에 만날 여름이 있어야만 했지만, 영원한 봄날이 되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있어야 할 여름들이 봄날의 바다아래 잠겼다.
그렇게 믿었던 여름이 오지 않았다.
남겨진 추억보다 만들 추억이 많았을 그들의 명복을 빕니다.
출처:mlb파크 북풍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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