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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천천히 불어제끼는 입김이 하얗게 세어 하늘에서 춤춘다.
12월, 이때까지만 해도 찬바람만 쌩쌩 불며 파랑색만 비춰주던 하늘이건만 오늘따라 하얀색으로 가득 덧칠되어있다.
바람만 해도 사람이 아주 죽겠는데 이 놈의 하늘은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구나. 보아하니 한바탕 내릴 것 같다.
“....으으, 추워 죽겠네.”
기세 좋게 도망친 것 까진 좋았지만, 몸에 걸치고 있는 게 달랑 와이셔츠 하나라는 게 서글프기 짝이 없다.
여기에 눈까지 내린다면 재수가 없는 경우엔 동사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일단 뭐라도 좀 입어야겠는데..”
금방이라도 굳을 것 같은 손발을 계속해서 움직이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조금 있으면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더욱 도망치기 힘들어진다.
당장 쫓아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여유가 있는 틈에 거리를 벌려놓아야...
“아우.”
발바닥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진다, 살펴보니 벌겋게 피가 한 줄기 흐르고 있다.
유리병 조각이라도 밟았나...
“씁, 따거...”
내딛으면 통증이 발바닥에 퍼지기에 한손을 벽에 짚은 채 깽깽이발로 나아간다.
마침 보는 사람도 없기에 딱히 부끄러움 같은 건 느끼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왠 정신나간 여자가 찬바람 씽씽 부는데 와이셔츠 한 장만 입고 외출을 했나 싶겠다만,
일일이 사정을 설명할 만큼 여유가 넘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0분, 20분.. 30분..
얼마나 걸었을까. 얼마나 멀리 왔을까.
하늘은 완전히 검은색으로 뒤덮혔고,
하늘에 있을 곳을 빼앗긴 하얀 구름은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눈송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발 밑에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온 몸에 감각이 무더져간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발을 이끌며, 멍한 머리로 배꼽시계가 울릴 때라고 생각할 즈음일까.
이제는 기왓장 한 무더기보다 무거워진 다리를 질질 끌며 골목을 빠져나왔을 때, 나는 넓은 공터로 나왔고,
그 공터에서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기묘하다기보다는 황당한 광경이었다.
겉보기엔 30대, 아니.. 40대일까. 하지만 얼굴에 좍좍 그여있는 주름살은 그 이상의 무게를 짐작케 할 정도로 무거워보였다.
그의 손에는 금빛 손잡이가 씌어진 검은 지팡이가 들려있었고,
그의 머리와 몸은 완벽하다는 표현을 써도 좋을 만큼 검은색으로 뒤덮혀 있었다.
검은색 중절모.
검은색 코트.
그리고 검은색 구두.
하지만 내가 우스꽝스럽게 느낀 것은 그의 복장이 아니었다.
온 몸을 검은색으로 치장하고, 인생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주름살을 가진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눈밭을 뛰어다니고 춤추고 있다는 것이, 더없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어떤 때는 강 위를 뛰어다니는 얇은 돌처럼 통통 튀고,
어떤 때는 바람에 휘날리는 작은 씨앗처럼 하늘하늘거리고,
또 어떤 때는 아이의 손에 들려있는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돌고,
튀고, 돌고, 다시 발걸음을 모으고, 그리고 다시 튀고, 돌고...
마치 자신이 한 송이의 눈이 된 것처럼, 그는 계속해서 춤추고 있었다.
그 광경에 넋을 잃은 나는 배고픔마저 잊어버리고 그의 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춤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배고픔에 지쳐 떼를 쓰는 내 뱃소리와 함께, 그의 발은 멈추었으니까.
꽤나 멀리 있었는데, 그는 용케도 그 소리를 알아챈 것 같았다.
내 소리가 커서 그런걸까.
그런 생각이 듬과 동시에, 내 귓불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서 하얀 수염 너머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배가 고픈가? 아가씨.”
그 말을 들은 나는, 얼굴과 머리를 뜨겁게 달군 채 강하게 머리를 휘저었다.
허나 이윽고 들려오는 두 번째 뱃소리에 남자는 얼굴 한가득 너털웃음을 지었고,
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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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셔츠 짤을 보고 머릿속에서 부푼 망상을 글로 옮겼습니다
망상은 즐거워요,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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