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오유 바로가기
http://m.todayhumor.co.kr
분류 게시판
베스트
  • 베스트오브베스트
  • 베스트
  • 오늘의베스트
  • 유머
  • 유머자료
  • 유머글
  • 이야기
  • 자유
  • 고민
  • 연애
  • 결혼생활
  • 좋은글
  • 자랑
  • 공포
  • 멘붕
  • 사이다
  • 군대
  • 밀리터리
  • 미스터리
  • 술한잔
  • 오늘있잖아요
  • 투표인증
  • 새해
  • 이슈
  • 시사
  • 시사아카이브
  • 사회면
  • 사건사고
  • 생활
  • 패션
  • 패션착샷
  • 아동패션착샷
  • 뷰티
  • 인테리어
  • DIY
  • 요리
  • 커피&차
  • 육아
  • 법률
  • 동물
  • 지식
  • 취업정보
  • 식물
  • 다이어트
  • 의료
  • 영어
  • 맛집
  • 추천사이트
  • 해외직구
  • 취미
  • 사진
  • 사진강좌
  • 카메라
  • 만화
  • 애니메이션
  • 포니
  • 자전거
  • 자동차
  • 여행
  • 바이크
  • 민물낚시
  • 바다낚시
  • 장난감
  • 그림판
  • 학술
  • 경제
  • 역사
  • 예술
  • 과학
  • 철학
  • 심리학
  • 방송연예
  • 연예
  • 음악
  • 음악찾기
  • 악기
  • 음향기기
  • 영화
  • 다큐멘터리
  • 국내드라마
  • 해외드라마
  • 예능
  • 팟케스트
  • 방송프로그램
  • 무한도전
  • 더지니어스
  • 개그콘서트
  • 런닝맨
  • 나가수
  • 디지털
  • 컴퓨터
  • 프로그래머
  • IT
  • 안티바이러스
  • 애플
  • 안드로이드
  • 스마트폰
  • 윈도우폰
  • 심비안
  • 스포츠
  • 스포츠
  • 축구
  • 야구
  • 농구
  • 바둑
  • 야구팀
  • 삼성
  • 두산
  • NC
  • 넥센
  • 한화
  • SK
  • 기아
  • 롯데
  • LG
  • KT
  • 메이저리그
  • 일본프로야구리그
  • 게임1
  • 플래시게임
  • 게임토론방
  • 엑스박스
  • 플레이스테이션
  • 닌텐도
  • 모바일게임
  • 게임2
  • 던전앤파이터
  • 마비노기
  • 마비노기영웅전
  • 하스스톤
  • 히어로즈오브더스톰
  • gta5
  • 디아블로
  • 디아블로2
  • 피파온라인2
  • 피파온라인3
  • 워크래프트
  • 월드오브워크래프트
  • 밀리언아서
  • 월드오브탱크
  • 블레이드앤소울
  • 검은사막
  • 스타크래프트
  • 스타크래프트2
  • 베틀필드3
  • 마인크래프트
  • 데이즈
  • 문명
  • 서든어택
  • 테라
  • 아이온
  • 심시티5
  • 프리스타일풋볼
  • 스페셜포스
  • 사이퍼즈
  • 도타2
  • 메이플스토리1
  • 메이플스토리2
  • 오버워치
  • 오버워치그룹모집
  • 포켓몬고
  • 파이널판타지14
  • 배틀그라운드
  • 기타
  • 종교
  • 단어장
  • 자료창고
  • 운영
  • 공지사항
  • 오유운영
  • 게시판신청
  • 보류
  • 임시게시판
  • 메르스
  • 세월호
  • 원전사고
  • 2016리오올림픽
  • 2018평창올림픽
  • 코로나19
  • 2020도쿄올림픽
  • 게시판찾기
  • 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아리아드네-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가입 : 13-08-14
    방문 : 164회
    닉네임변경 이력
    회원차단
    회원차단해제
    게시물ID : panic_60320
    작성자 : 사월토끼
    추천 : 19
    조회수 : 3799
    IP : 211.246.***.137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13/11/12 20:14:01
    http://todayhumor.com/?panic_60320 모바일
    (이글루스 펌)(스압)실록을 떠도는 어둡고 참혹한 이야기 10선
    <font size="3"><b>*이 내용은 이글루스의 게렉터님 <a target="_blank" href="http://gerecter.egloos.com/4438550" target="_blank">http://gerecter.egloos.com/4438550</a> 의 포스팅을 퍼 온 것입니다.</b></font> <div><font size="3"><b><br /></b></font></div> <div><font size="3"><b>*밑에 원 작성자님도 언급하셨지만 다소 잔인한 묘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b></font></div> <div><font size="3"><b><br /></b></font></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div>조선시대는 그 시대가 길고 문헌 자료가 매우 풍부한 시기입니다. </div> <div>특히, 상당히 많은 자료들이 이미 http://www.minchu.or.kr 같은 웹사이트를 통해서 </div> <div>무료로 인터넷에 공개되어 자유롭게 검색할 수 있게 되어 있으므로, </div> <div>누구나 손쉽게 안방에서 여러가지 자료를 살펴보기가 좋습니다. </div> <div>그 중에서도 특히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은 체계적이면서도 당시 상황의 생생한 기록을 가장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자료라고 할 것입니다.</div> <div><br /></div> <div>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실 중에서 어둡고 참혹한 이야기들을 일종의 납량특집으로 발췌해 본 것입니다. </div> <div>나오는 사건들 중에 사실관계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든가, </div> <div>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적할 내용을 보충하거나 수정해야할 사항이 있으시다면 지적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div> <div>가능한한 빨리 모두 반영하겠습니다.</div> <div><br /></div> <div>주의하실 점이 있습니다. 아래 내용에는 잔인하고 비도덕적인 내용들에 대한 묘사들이 적나라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div> <div>이러한 내용을 읽지 않으셔야 하시는 분께서는 읽지 않고 건너 뛰시기 바랍니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1.</div> <div>1431년. 함길도에서 일종의 기생충에 대한 목격담으로 보이는 기괴한 사건이 보고 되었다.</div> <div><br /></div> <div>한 여자가 남자를 저주하기 위해, 뱀 모양의 그림을 넣어 놓은 이상한 음식을 남자에게 먹였다. 이후 남자는 갑자기 복통을 느끼며 괴로워 했다. </div> <div>남자의 복통을 치료하기 위해 약재로 사용하는 곰취 뿌리를 남자에게 먹였더니, 남자의 배에서 뱀과 꼭 닮은 모양의 이상한 것이 세 마리가 나왔다. </div> <div>이 뱀들 중에 두 마리를 죽이고 한 마리를 개에게 먹여 보았는데, 그러자 개는 3일만에 죽어 버렸다. 정황을 살펴보기 위해 개를 해부해 보았더니, </div> <div>뱀은 개의 뱃속에서 그때까지도 살아 남아서 꿈틀거리고 있었다.</div> <div><br /></div> <div>사건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라서, 관청에서는 상황을 정확히 조사하기 위해 모든 관련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div> <div>그런데 조사를 아무리 진행해도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어서 마냥 사람들을 감옥에 가둬 놓고 긴 시간 동안 방치하게 된다. </div> <div>결국 사람들은 의미 없이 감옥에 끝도 없이 갇혀 있으면서 조사 당하는 것에 고통을 느꼈는지 대부분 감옥에서 목을 매어 자살해버린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2.</div> <div>조선 시대에는 범죄를 수사한 후 그 범죄를 증명할 때에 범인의 "자백"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div> <div>때문에 자백을 받기 위해 범인을 고문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기본적인 고문 방법은 나무 몽둥이로 때리는 것과 채찍으로 치는 것이었다. </div> <div>비위생적이고 몸을 가누기 어려운 감옥에 몇날 며칠이고 가두어 놓으면서 사람을 치게 되면, </div> <div>고통이 커서 거짓 자백하게 되는 일이 많았고, 고문 중에 사람이죽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div> <div><br /></div> <div>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고문을 심하게 하는 것의 위험함을 지적하는 의견이 조정에 계속 제시되었다. </div> <div>그리고 고문 방법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에 대한 논의도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상은 얼굴에 문신을 새기거나, </div> <div>사람을 매달아 놓는 도가 지나친 고문 방법도 자주 사용되었으며, 주리를 틀거나, 무거운 돌로 짓눌러 다리 뼈를 부수는 고문도 종종 이루어졌다.</div> <div><br /></div> <div>1608년. 온양의 8, 9개 마을에서 10여명의 사람들이 난데 없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잡혀온 이유</div> <div>곧 반란을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div> <div>잡혀온 사람들은 반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범한 주민들이었으므로 크게 당황하게 된다. </div> <div>사연인즉슨, 당시 온양의 군수였던 이질수(李質粹)가 우연히 활을 제조하는 기술자로부터 항간에 떠도는 헛소문을 들은 것이 발단이었다. </div> <div>온양에서 반란을 도모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은 막연하게 넘겨 짚는 생각에 지나지 않았으나, </div> <div>이질수는 반란을 하는 무리들을 체포하면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취되어 버린 것이었다. </div> <div>이질수는 정확히 사실을 파악하기도 전에 충청도 감사 이용순(李用淳)에게, 자신이 반란을 꾸미고 있는 무리들을 잡을 것이라고 보고해 버린다.</div> <div><br /></div> <div>상부에 보고를 하고 대충 짚히는 사람 10여명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지만, </div> <div>이질수는 그제서야 자신이 허무맹랑한 뜬소문을 잘못 넘겨 짚고 일을 벌인 것임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div> <div>그렇다고 이미 "반란을 꾸미는 무리들이 있다"는 엄청난 보고를 올린 마당에 자신이 헛소리 한 것이라고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div> <div>반란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가 부주의하게 잘못된 사실을 퍼뜨리고 </div> <div>무고한 사람을 체포한 일이 되어 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div> <div>이것은 자신이 승진하는데 큰 얼룩으로 남을 일일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처벌을 받을 가능성도 컸다. </div> <div>이질수는 결국 어떻게든 체포된 사람들이 정말로 반역을 꾸민 범죄자로 꾸며야 했다. </div> <div>이질수는 붙잡은 사람들이 진짜 범인이기를 간곡하게 바랬기에 </div> <div>스스로 자신이 체포한 사람들이 반역자임에 틀림없다고 자꾸만 스스로 되뇌이면서 믿었던 듯 하다.</div> <div><br /></div> <div>그러나, 잡혀 있는 사람들로서도 없는 사실을 실토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반란을 꾸민 죄는 처벌이 사형 밖에 없으며 </div> <div>그 처형 방식도 매우 잔인했기 때문에 보통의 고문 방법으로는 범죄에 대한 인정을 하기 어려웠다. </div> <div>이때문에 이질수는 새로운 고문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div> <div>이질수는 잡혀온 사람들을 감옥에서 꺼낸 뒤 철로 되어있는 기묘한 크기의 솥 앞에 앉혀 놓았다. 그리고 그 솥에 불을 지펴 벌겋게 솥을 달구면서, </div> <div>잡힌 사람들에게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달군 솥을 머리통에 뒤집어 씌우겠다고 한 것이다. 죄가 없는 사람들이 만족할만한 답을 하지는 않았고, </div> <div>이질수는 달군 솥을 머리에 씌워 버렸다. 사람은 고통스럽게 죽어나갔다. 이런 방법으로 이질수는 사람들을 차례로 죽여나갔다.</div> <div><br /></div> <div>이질수는 반쯤 미쳐서 고문을 계속 진행해나갔다. 그런데, 고문을 진행하던 도중 맑은 대낮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졌고, </div> <div>불이 꺼지고 솥이 빗물에 식게 되어 고문을 계속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제서야 이질수는 크게 겁을 먹고 허겁지겁 고문을 중단했다.</div> <div><br /></div> <div>상황이 무시무시하게 돌아가자, 이질수는 당황한다. 당시 이질수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신분을 위조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div> <div>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닥치는대로 마을들을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div> <div>이질수는 신분을 위조한 사람들을 쫓아다니다가 조사하게 되는 민가의 주민들을 심하게 괴롭혔고, </div> <div>나중에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는지, 이질수 스스로 애꿎은 민가의 재물을 범죄와 연루된 것이라고 몰아 붙이며 약탈하며 다니게 된다. </div> <div>결국 나중에는 온양 인근 사람들이 짐을 싸서 피난을 떠날 준비를 하기에 이른다.</div> <div><br /></div> <div>이질수가 가두어 두고 고문했던 사람들 중에 살아 남았던 사람들은, </div> <div>이 사건을 서울 조정에서 직접 관할하게 되면서 대부분 죄가 없는 것으로 풀려나게 된다. </div> <div>이후 조정에서는 온양 일대의 민심이 흉흉해진것을 바로 잡기 위해 특별히 승지를 파견하여 상황을 추스리게 하였다. </div> <div>한편 모든 사건의 중심이었던 이질수는 1609년 1월 3일 지평이었던 한찬남(韓纘男)의 건의로, 파직되어 자리에서 쫓겨 나게 된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3.</div> <div>1461년에는 갑산(甲山) 지역의 군사(郡事)로 재직하고 있던 정희문(鄭希文)이 살인을 저지른 후 감옥에 갇혔다. </div> <div>그런데 정희문은 감옥에서 탈출 했다가 현감으로 있던 진치화(陳致和)에게 다시 체포되었다. 체포된 정희문이 모든 사실을 자백했는데, </div> <div>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치화는 정희문의 발바닥을 몽둥이로 때리는 고문을 했다. </div> <div>이에 정희문은 화가 나서, 진치화가 자신에게 가하는 고문이 부당하다고 지적한 뒤에, </div> <div>진치화가 관청의 재산을 횡령하여 서울의 본가로 몰래 보낸 사실을 말하면서 욕을 한다. 진치화는 여기에 광분하여, 정희문의 가족들을 잡아 가두고, </div> <div>정희문의 입에 재갈을 물린 뒤에, 잘 드는 칼로 온몸의 살을 조금씩 조금씩 긁어 내는 잔인한 고문을 가해버린다.</div> <div><br /></div> <div>1678년에는 이인한(李仁漢)이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인 김제원(金悌元)에게 빚 독촉을 했다. 그런데 빚 독촉에 시달리던 김제원이 도주해버리자, </div> <div>이인한은 김제원 대신에 그 아내인 귀영(貴英)을 붙잡는다. 참봉 벼슬을 지낸 적이 있었던 부유한 사람이었던 </div> <div>이인한은 자기 집 안에 사람을 가둘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이인한은 바로 이곳에 귀영을 감금했다. </div> <div>이인한은 이곳에 귀영을 한 달 이상 감금하면서 계속 채찍으로 때리며 고문하였다. 귀영이 결국 그대로 죽어버렸고, </div> <div>이인한은 부하들을 시켜 죽은 귀영의 목을 줄로 묶어서 목 매달아 죽은 것처럼 위장한 뒤에 도성 밖에 시체를 버렸다.</div> <div><br /></div> <div>죽은 귀영의 모친이 귀영이 실종된 후 시체로 발견 되자, 이인한이 의심된다고 신고하여 조정에서는 이인한을 조사하게 된다. </div> <div>그러나 이인한은 조정의 주요 세력가들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고문을 당하지 않았고, 이인한의 부하들만 고문을 당했다. </div> <div>고문 과정에서 이인한의 부하들만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부당하다 하여 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이 이인한을 비호했으므로, </div> <div>이인한은 결코 같이 조사 받지 않았다. 이인한은 은 10냥을 벌금으로 내는 정도의 처벌을 받게 되나, 그마저 후에 사면 받게 된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4.</div> <div>조선시대에는 종, 곧 "노비"라는 신분이 있었다. 종은 주인의 소유물로 취급되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div> <div>반드시 주인을 섬기고 복종해야 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물론 종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종이라고 해도 함부로 죽이면 큰 죄로 처벌되었다. </div> <div>하지만, 반대로 종이 주인을 배반하는데 대해 주인이 처벌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고, </div> <div>종종 도가 지나치게 주인이 종을 처벌하는 일들이 문제가 되었다.</div> <div><br /></div> <div>1488년. 세력가였던 유하(柳河)의 아들 중에 유효손(柳孝孫)은 자신의 종이었던 효양(孝養)과 강제로 동침하려 하였다. </div> <div>효양은 유효손을 계속해서 거부하며 피했다.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유효손은 이것은 종이 주인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div> <div>그에 대한 처벌을 가하기 위해 효양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유효손은 먼저 효양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꺾어 부러뜨려서 효양에게 고통을 주었다. </div> <div>그 뒤에 불에 달군 쇠를 가져 와서, 효양의 몸 구석구석에 있는 힘줄들을 뜨겁게 지졌다. </div> <div>이것은 앞으로는 함부로 반항하지 말고 도망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div> <div>마지막으로 유효손은 더이상 달아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로 송곳으로 효양의 발 뒤꿈치에 구멍을 뚫어 버린 뒤에, </div> <div>거기에 끈을 꿰어 효양을 묶어 놓았다.</div> <div><br /></div> <div>이 사건은 효양의 숙부인 마미치(馬未致)가 삼사에 고발함에 따라 조정에 알려졌다. </div> <div>조정의 처벌은 유효손의 집안에 있는 모든 효양의 가족들을 유효손으로 부터 빼앗는 것이었으며, 더이상 종이 아닌 신분으로 고치는 것이었다. </div> <div>자신이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된 효양은 유효손이 붙잡혀서 고문 받으며 </div> <div>조사 받는 곳에 직접 기어나와서는 유효손의 얼굴을 보고 강간범이라고계속 해서 욕을 했고, 유효손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5.</div> <div>1474년. 서울 동대문 밖 산에서 이상한 고기 덩어리 같은 것이 발견되었다. </div> <div>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온몸 구석구석을 뜨거운 쇳덩이로 지져댄 자국이 있는 사람이었다. </div> <div>그 사람은 산에 버려진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이 미약하게 나마 붙어 있었다. </div> <div>그 사람은 부유한 집안인 신자치(愼自治)의 여자 종으로 이름은 도리(道里)였다.</div> <div><br /></div> <div>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신자치의 부인이었던 이씨(李氏)는 도리가 신자치와 동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div> <div>종 때문에 자신이 신자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이씨는 도리에게 격렬한 질투심과 분노를 느낀다. </div> <div>이씨는 자신의 친모와 함께 도리를 붙잡고 형벌을 가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도리의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버린 뒤에, </div> <div>도리에게 죄를 물으면서 수없이 구타하였다. 그리고 쇠를 달구어 우선 가슴과 성기를 지져버린 뒤에, </div> <div>몸 구석 구석 이곳저곳을 지지면서 고문하여 피부 곳곳이 온전한 곳이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동대문 밖의 산에 내던져 버린 것이다. </div> <div>그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도리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자살 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한참 동안 혼자 미약한 생명을 조금씩 이어가고 있었다. </div> <div>그리고 마침내 발견되어 세상에 이 끔찍한 일을 알리게 된 것이었다.</div> <div><br /></div> <div>1427년 8월 20일. 거리에서 한 사나이가 알 수 없는 물건을 지고 가는 것이 발견 되었다. 그것은 사람과 비슷한 형상이었으나, </div> <div>뼈와 가죽만 파리하게 붙은 처참한 모양이었다. 결국 그것은 덕금(德金)이라는 여자로 밝혀졌다. </div> <div>덕금은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재직하고 있는 권채(權採)의 종으로, 권채와 그 일가족을 조사한 결과, 무서운 사실이 밝혀졌다.</div> <div><br /></div> <div>권채는 덕금을 사랑하여 첩으로 삼았는데, 권채의 아내 정씨(鄭氏)는 종인 덕금에게 강렬한 질투와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div> <div>그러던 중, 덕금은 덕금의 할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를 찾아 뵈러 집을 잠시 떠날 것을 청했다. </div> <div>하지만 평소에 덕금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정씨는 덕금이 그 할머니를 찾아가는 것을 허락을 하지 않았다. </div> <div>그러나 덕금은 병에 걸려 죽어가는 자신의 할머니 생각이 너무도 애틋하여, 허락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잠시 집을 떠나게 된다.</div> <div><br /></div> <div>덕금이 사라지자 권채는 덕금을 찾게 되었고, 정씨는 권채에게 덕금이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간통하러 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div> <div>그러자 권채는 격렬하게 질투하고 분노하게 되어, 덕금이 돌아오자마자 덕금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몽둥이로 덕금을 마구 구타하였다. </div> <div>권채는 덕금의 왼쪽 발에 족쇄를 채워서 외딴 방에 감금하였다. 이후, 권채 일가는 잔혹하고 변태적으로 덕금을 괴롭히게 된다.</div> <div><br /></div> <div>장씨는 덕금을 바로 칼로 베어 죽이려 했는데, 또다른 여자종인 녹비(祿非)가 칼로 죽인 시신은 소문이 나기 쉽고 금새 누구인지 밝혀낼 수 있으니, </div> <div>서서히 고문하면서 병들고 굶어 죽도록 하자는 제안을 한다. 장씨는 녹비의 제안을 받아 들여서 감금되어 있는 덕금을 그대로 굶어 죽이기로 한다. </div> <div>장씨는 덕금이 덕금 자신의 배설물과 함께 비참한 모습으로 족쇄를 차고 방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고, 굶주린 덕금에게 그 오물을 먹으라고 지시한다. </div> <div>덕금은 오물 사이의 구더기를 보고 질겁하여 격렬히 저항하였는데, </div> <div>그러자, 장씨는 덕금의 가랑이 사이에 바늘을 찔러 넣으면서 덕금을 괴롭혀서 결국 덕금이 구더기와 오물을 먹게 만든다. </div> <div>덕금은 그렇게 몇 달 동안이나 갇힌 채 매일 고문 받으면서 서서히 굶어 죽어 갔고, 마침내, </div> <div>비참한 몰골의 굶어 죽은 시체가 되었다고 보고 걸레처럼 버려지게 된 것이다.</div> <div><br /></div> <div>하지만, 덕금은 발견되던 순간까지 죽지 않은 상태였다. 제정신과 온전한 몸을 유지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div> <div>아슬아슬하게 목숨을 부지해 살아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권채와 정씨, 그 밖에 권채 집안의 종들을 모두 조사했으며, </div> <div>권채의 아내인 정씨가 주범으로 모든 죄의 벌을 받게 된다.</div> <div><br /></div> <div>권채는 정씨에게 속았을 뿐이며, </div> <div>덕금의 잔인한 처벌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지를 얻어 권채는 이후에도 당당하게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div> <div>실제로 권채는 유능한 학문적 재능을 보였으므로,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당시 조정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 받고 있었다. </div> <div>몇 개월 동안 덕금에 대한 온갖 잔혹한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권채는 정말로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기 보다는, </div> <div>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교묘하게 처신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div> <div><br /></div> <div>뛰어난 학식을 자랑한 고아한 양반이었던, 권채는 조선시대 최악으로 손꼽히는 감금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던 것이다. </div> <div>세상 이치가 허망하게도 권채가 남긴 저작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것은 인간의 예절과 도리에 대해서 사례를 든 책인 "삼강행실도"의 서문을 쓴 것이다. </div> <div>덕금은 곧 사망했지만, 후에 권채가 쓴 "삼강행실도"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걸작선을 모아 편집한 </div> <div>"동문선"에까지 등재 되어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div> <div><br /></div> <div>권채가 쓴 삼강행실도의 서문 본론 부분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div> <div>"임금과 어버이와 부부의 인륜에 대한 충, 효, 절의(節義)의 도리는 바로 하늘이 내린 천성으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갖고 있는 것이다. </div> <div>천지가 처음 생길 때부터 같이 생겼고 천지가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천성이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6.</div> <div>조선시대에 사람을 저주하는 주술을 시도하는 것은 매우 큰 범죄로 취급되었다. 따지고보면 한낱 허무맹랑한 헛수작에 지나지 않는것이지만, </div> <div>우선 원칙적으로 국론으로 배척하고 있는 미신을 믿는 것이라는 점에서 죄가 크게 취급 되었다. </div> <div>게다가 만약 성공하거나 실제로 저주가 위력을 발휘할 경우에는 전혀 원인을 알 수 없이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섭게 여겨졌다. </div> <div>가장 흔한 저주 방법은 죽은 동물의 시체나 뼈를 저주하고 싶은 사람의 곁에 놓아두는 것이었으며, 그 방식은 주로 무당들이 개발하고 주선하였다. </div> <div>특히 사람의 뼈나 시체가 효과가 좋은 것으로 소개하는 무당들이 많았으므로, </div> <div>살인을 하거나 무덤을 파헤쳐서 은밀히 사람 시체를 구해주는 전문적인 업자들이 있기도 했다. </div> <div>이런 업자들 중에는 1730년 체포된 김이건(金二建) 같은 인물이 유명했다.</div> <div><br /></div> <div>저주와 관련된 사건들 중에는 장희빈등이 언급되는 궁중 내부의 저주 사건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div> <div>가장 악명 높은 사건으로는 1730년 이만혁(李萬爀) 사건을 꼽을만하다.</div> <div><br /></div> <div>이만혁(李萬爀)은 당진(唐津) 현감(縣監)을 맡고 있는 자였으나, 한 점쟁이가 주장하는 저주 이야기에 심취하게 된다. </div> <div>이만혁은 자신이 잘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저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div> <div>저주를 위해 땅에 묻을 특수한 시체를 얻기로 결심하였다. </div> <div>점쟁이가 알려준 저주 방식을 위해서는 남자 한 사람과 여자 두 사람의 시체를 사용해야 했다. </div> <div>우선 이만혁은 종이었던 남자 한 사람과 여자 두 사람을 붙잡아 모두 죽을 때까지 구타하여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div> <div>그리고, 저주를 하기 위해 제작된 쇠로된 조각을 세 구의 시체 입에다 끼워 넣었다. </div> <div>그리고 가시가 박힌 가시나무를 시체에 박아 넣어 시체 셋이 가시나무에 꽂힌 모양이 되게 만들었다. </div> <div>그리고 이 시체를 다리 근처에다가 거꾸로 묻어 놓은 것이다.</div> <div><br /></div> <div>이만혁은 시체가 발견되면서 범행이 드러났고, 당진 일대 사람들이 끔찍하게 생각하여 수군거리게 되었다. </div> <div>당진의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리게 되면서, 소문이 퍼졌고, 이만혁은 그 처벌로 자리에서 쫓겨났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7.</div> <div>1500년대 후반부터, 조선에서는 점차 일종의 성병이 유행하게 된다. 주로 음란한 생활을 했던 한량들 사이에서 성병이 퍼졌는데, </div> <div>그 증상이 매우 고통스럽고 특히 징그러운 피부병을 앓다고 죽게 되므로 매우 비참한 질병으로 생각 되었다. </div> <div>1560년대 중반부터, 바로 이 성병을 치료하는데, 인간의 쓸개를 이용해 약을 만들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허황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div> <div>이것은 한 의원이 얼버무린 이야기가 발단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기록이 있다.</div> <div><br /></div> <div>처음에는 병에 걸린 사람이, 살인을 하는 전문 업자에게 돈을 주고 부탁하여, 사람을 깊은 산속으로 붙잡아 와서 살아 있는 채로 나무에 묶어 놓은 뒤, </div> <div>칼로 사람의 배를 잘라서 쓸개를 빼내는 형태의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점차 범죄가 늘어나면서 주로 어린아이들이나, </div> <div>허약하면서 가족이 없는 노숙자들이 범행의 주요 대상이 되었고, 나중에는 직업적으로 사람을 공격해서 쓸개를 빼내는 범죄자들이 생겨났다. </div> <div>결국 1607년에는 조정에 업자들이 이렇게 쓸개를 얻어서 중국으로 밀반입해서 더 큰 돈을 벌기도 한다는 보고가 나올 지경에 이른다.</div> <div><br /></div> <div>1565년 무렵, 1576년 무렵, 1607년 무렵, 세 차례에 걸쳐 이러한 사건들은 대유행 하였다. 서울의 종각 근처와 동활인서(東活人署), </div> <div>보제원(普濟院), 홍제원(弘濟院) 근처의 거리에는 당시 노숙자들이 많았다. 주로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걸치고 바가지를 든채 음식을 구걸하면서 </div> <div>연명하는 허약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참혹한 범죄의 희생이 되어 소리 소문 없이 점차 붙잡혀 죽어갔고, </div> <div>결국에는 일대의 노숙자들이 모두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div> <div>노숙자들이 모두 사라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민가의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자행되기 시작했다.</div> <div><br /></div> <div>이러한 범죄가 최고로 유행했을 때에는, 산골짜기에 나무에 묶인 채 배가 칼로 잘려서 내장을 드러내고 썩어 가고 있는 시체들이 </div> <div>잇달아 발견되어서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가는 것을 꺼릴 지경에 이르렀다. </div> <div>사람들 중에는 농사하러 밭에 나가 있는 것 조차 혼자 있기를 무서워하게 되기도 하였고, </div> <div>항상 거리를 다닐 때에 공격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이 서로 무리지어 다니게 되기까지 했다.</div> <div><br /></div> <div>1607년, 조정에서는 사건이 이처럼 심하게 퍼지도록 방치한 책임을 물어 포도대장을 파직시켰으며, 감옥에 수감하였다. </div> <div>이후 이러한 사건이 이전처럼 심하게 유행한 적은 없었으나 비슷한 부류의 잔인한 살인사건은 가끔 발생하였으며 심지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div> <div>범죄는 완전히 근절되지 못했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8.</div> <div>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일본인 해적들이 피해를 입히는 일이 많았고, 한편으로는 밀수를 위해 조선에 모여드는 일본인들도 잦았다. </div> <div>때문에 1500년대 초반에는 일본인이라면 일단은 해적이나 밀수꾼의 무리, 혹은 이리저리 흘러들어와서 민폐를 끼치며 <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사는 무리 정도로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보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더우기 군인들로서는 일본 해적들과 싸우는 것이 실전에서 공을 세우는 가장 흔한 기회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span></div> <div>일본인을 멸시하고 학대하는 경우가 잦았다.</div> <div><br /></div> <div>당시 일본인들 중에는 조정의 허가를 받고 해변에 머물며 지내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div> <div>이들 때문에 조선 당국은 여러가지 골치아픈 문제를 많이 겪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일본인들은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div> <div>단적인 예로 수사(水使)로 재직하고 있던 이종의(李宗義)는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던 일본인 10여명을 보고는, </div> <div>괜히 해안에 온 해적이라고 착각이라도 했는지, 이유 없이 마구잡이로 죽여 버린 일도 있었다.</div> <div><br /></div> <div>이중에 가장 악명 높은 사람으로는 부산포 첨사로 재직하고 있던 이우증(李友曾)을 꼽을 수 있다. </div> <div>군인이었던 이우증은 일본인들을 여러가지로 괴롭히는 것을 일종의 놀이로 여기며 즐기곤 했는데, 그중에서 활쏘기 놀이가 널리 회자 되었다.</div> <div><br /></div> <div>이우증은 일본인을 붙잡은 뒤에 머리카락에 노끈을 묶고는 그 끈 끝트머리를 집의 천장에 그대로 매달아 놓았다. </div> <div>그러면 매달린 사람은 머리카락이 아파서 매달린 채로 팔다리를 버둥거리게 되는데, 이우증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으로 부터 한참 떨어져서 </div> <div>서서는 갑자기 자신의 활솜씨를 자랑하겠다고 활을 빼든다. 그리고, 이우증은 화살을 쏘아서 일본인을 매달아 놓은 끈을 맞추겠다고 하는데, </div> <div>그러면 매달린 일본인은 화살을 잘못 맞을 까봐 크게 겁을 먹고 소리를 지른다. </div> <div>그러다가 화살을 맞춰서 끈이 끊어지면 일본인이 바닥에 떨어져 나동그라지게 되고, </div> <div>그러면 이우증은 그 모습을 보며 유쾌하게 즐거워하며 자신의 활솜씨를 뽐냈다.</div> <div><br /></div> <div>이우증이 일본인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그 끈을 활쏘기하면서 노는 것은 당시에 절도사로 재직하고 있던 유계종(柳繼宗)도 목격하게 되었다. </div> <div>그런데 유계종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즐거워 하면서 크게 칭찬하였고, </div> <div>덕분에 이우증이 매달아 놓은 일본인에게 활을 쏘면서 괴롭히는 행동이 크게 유행해서 일본인들이 머무는 곳 근처에 있는 조선군 부대 각지에 </div> <div>이렇게 일본인을 괴롭히는 것을 따라하게 된다.</div> <div><br /></div> <div>얼마후, 조선에 거주하던 부산 일대의 일본인들이 대마도주 휘하 세력의 지원을 얻어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삼포왜란인데, </div> <div>이우증은 바로 전날까지도 일본인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묵살했고, 도리어 화를 내며 보고한 사람를 문책하였다. </div> <div>이우증은 뒤늦게 일본인들이 급습해 오자 황급히 도망친다. 그러나 결국 풀섶에 숨어서 떨고 있던 이우증은 일본인들에게 발견되었고, </div> <div>여러 일본인들에게 마구 난도질 당하여 죽게 된다.</div> <div><br /></div> <div>폭동이 일어나자 일대의 조선군들은 겁을 먹고 대부분 도망치거나 후퇴해 버려서, 일본인들은 부산 일대의 마을들을 장악한다. </div> <div>일본인들은 마을의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여 매일밤 술판을 벌이며 놀기 시작했다. 이때 불탄 조선의 민가가 1천채에 가까웠는데, </div> <div>공식 기록에는 796호가 불에 탔다고 기록되어 있다.</div> <div><br /></div> <div>후퇴한 조선군은 반격하지 않고 숨어 있으면서 조정에 계속 지원군을 보내줄 것만을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마땅히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서, </div> <div>폭동을 일으킨 일본인들의 관련 세력과 어떻게 화친을 맺어보자는 다소 얼토당토 않은 논의까지 진행되기도 했다.</div> <div><br /></div> <div>마침내 조선군에서는 유담년을 지원군을 이끄는 장군으로 삼아 부산 방향으로 지원군을 보낸다. </div> <div>유담년은 지나치게 잔인한 일을 많이 저지른 부패한 군인으로, </div> <div>그 죄로 자리에서 쫓겨나 집에서 놀고 있었다. 유담년은 다시 장군이 되어 군사를 이끌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팔뚝을 걷어 붙이며 </div> <div>"나는 가뭄이 들었을 때의 나막신과 같아서, 아무 쓸모 없이 여기다가, </div> <div>장마가 졌을 때가 되면 그제서야 쓰일 뿐이다"라고 비아냥 거리면서 소리 질렀다. </div> <div>당시 조선 군인들은 대낮에 괜히 약탈을 하는가 하면, </div> <div>서울 시내의 폭력배와 범죄자들이 약탈을 하기 위해 군인들 사이에 끼어들어 같이 약탈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div> <div><br /></div> <div>우여곡절 끝에 조선군은 일본인들을 전멸시키는데 성공하여, 일본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에 끝없이 널브러져 있게 된다. </div> <div>이때 가장 악명을 떨친 사람은 소기파(蘇起坡)라는 군인이었다. </div> <div>소기파는 재물이나 승진에는 큰 관심이 없으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면서 오직 전투에만 전념하는 사람이었다. </div> <div>소기파는 이미 북방의 여진족들과도 전투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고, </div> <div>아마도 전쟁터에서 사람과 싸우고 사람을 죽이는데, 기괴한 취미를 갖게 된 듯 보인다.</div> <div><br /></div> <div>소기파는 당시 죽은 일본인 시체들 사이를 뒤지고 다니며 혹시 살아 있는 사람이 없는지 찾아 다녔다. </div> <div>만약 시체들 사이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소기파는 자신의 칼을 뽑아서 그 사람의 배를 갈라버렸다. </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그리고 얼굴과 손에 그 피를 묻혀 바르며 즐거워 했고,</span></div> <div>그 자리에서 술병에서 술을 따라마시면서 그 사람의 내장을 그대로 꺼내어 씹어먹으며 안주로 삼았다. </div> <div>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끔찍하게 여겨서, 소기파를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의 마귀인 야차와 같다고 하여, </div> <div>소야차(蘇夜叉)라는 별명으로 불렀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이 사건은 295명의 일본인의 목을 잘라서 일본인들이 드나드는 곳에 높다란 무덤으로 쌓아 놓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div> <div>삼포왜란 당시의 초라한 후퇴와 문제가 많은 전투들에 대해서는 책임 문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div> <div>당시에 이르렀던 졸렬한 화친 논의에 대해서도 뒤에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덮어 놓고 잊고 넘어가기에 급급했다.</div> <div><br /></div> <div>그러면서도 일본인들에 대한 반발심과 적개심만 더욱더 극심해졌는데, 그러다보니 어이 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div> <div>1545년 전라도 흥양(興陽)에서는 중국배 세 척이 표류하여 해변에 도착한다. </div> <div>당시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소연(蘇連)은 이 배에 탄 중국인들이 일본인 해적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인근 부대에 연락하여 일대의 모든 군병력을 </div> <div>동원하여 <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공격하기 시작했다.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중국인들은 자신들은 일본인도 아니고 일본인 해적은 더더욱 아니었으므로, 울부짖으며 도망치면서 산속으로 숨었는데, </span></div> <div>조선군은 끝까지 이들을 추적하여 표류한 중국인 108명을 학살해 버렸다.</div> <div><br /></div> <div>조정에서는 표류한 중국인들을 잘못 죽인 것을 나중에 알고, 이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지 않도록 고민해야 했고, </div> <div>괜히 학살당한 중국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성대하게 치러주는 따위의 일을 벌였다.</div> <div><br /></div> <div>당시 역사를 편찬하던 기록을 보면 삼포왜란을 기점으로 일본인들이 조선을 무시하고 가소롭게 보기 시작한 것으로 볼만하다는 평이 있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9.</div> <div>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리며 비참한 일들을 겪은 기록 중에 가장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은 </div> <div>1670년과 1671년, 2년간 이어진 대기근이었다. 이 2년 동안 각종 자연재해로 농산물이 매우 부족해지고 전염병마저 유행하면서, </div> <div>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굶어죽는 참사가 일어났다.</div> <div><br /></div> <div>1671년 1월 무렵의 겨울이 그 피해가 최악에 달한 시기였는데, 굶주려 낯빛이 누런 백성들이 관청에서 나눠주는 죽을 얻어 먹으려고 </div> <div>나와 있다가 창고가 텅텅비어 죽을 못 먹게 되자 멍하니 지켜보고 있다가 죽는 일들이 속출했다. </div> <div>결국 많은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서로 도둑질을 하는 일들이 많았고, 집에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으면 곧 약탈을 당하곤 했다.</div> <div><br /></div> <div>거리 곳곳에 죽은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관청에서는 시체를 수레에 수북하게 쌓아서 계속 운반해야 했다. </div> <div>쌓여 있는 시체들 중에는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는데, 시체 속에 묻힌채로 그렇게 실려가다가 서서히 죽어갔다. </div> <div>시체의 발에 줄을 묶어서 질질 끌고 가서 묻기도 했는데, 굶어죽기 직전의 사람들이 미리 발에 줄을 묶어 놓은 채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으면서 </div> <div>죽기를 기다리는 비참한 광경이 도처에서 펼쳐졌다. 1671년 1월 11일 전라도 감사로 재직하고 있던 오시수(吳始壽)는 </div> <div>"전 지역에서 갓난 아이를 기르기를 포기하고 강물과 개천에 내던져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 하기도 했다.</div> <div><br /></div> <div>추위가 심했으므로, 옷을 벗겨 훔쳐가는 강도들도 많아졌다. </div> <div>굶어서 걸인이 된 사람들은 귀신과 같은 몰골로 맨몸에 짚푸라기를 엮은 것을 배와 등에 두르고 추위에 버티고 있었으며, </div> <div>사람들은 시체에 입혀 놓은 수의를 벗겨가기 위해 산에서 무덤을 파헤쳐서 썩은 시체에서 옷을 벗겨가는 일도 많았다. </div> <div>여기 저기에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시체가 많았으므로 빈민을 구체하는 진휼청에서는 시체를 흰 천으로 싸서 땅에 묻게 하였는데, </div> <div>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은 이것을 파헤쳐서 시체를 싼 천 조각을 훔쳐갔다.</div> <div><br /></div> <div>1671년의 기근을 일컬어 노인들은 생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평가했고, </div> <div>임진왜란을 겪은 생존자들은 이 기근이 전쟁보다도 더욱 참혹한 상황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div> <div>이 기근을 버텨내기 위해 조선의 모든 빈민 구제 제도들과 관계 관청들이 모두 동원되었으며, </div> <div>역사적으로는 당시 조선의 정치와 경제 상황의 많은 사항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div> <div><br /></div> <div>1671년의 대기근을 지내는 동안 한 가족이 모두 굶어 죽은 집은 물론이요,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굶고 병들어 죽어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 </div> <div>당시 서울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정식으로 무덤을 만들만한 사정이 되지 못해서 성벽 아래에 대충 시체를 파묻곤 했는데, </div> <div>약 100년 후인 1753년, 지평으로 일하고 있던 이상윤(李尙允)은 동대문 일대의 성벽을 수리하는 공사 과정에서 성벽 아래에서 </div> <div>수천명 분량의 사람 뼈들이 <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발견된 것을 알고 경악하여 조정에 보고하는 일도 있었다. </span></div> <div><br /></div> <div>1671년의 기근은 조정에서 가장 큰 문제로 논의된 일이었으므로, 정치 파벌간의 싸움에서 중요한 소재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div> <div>그 와중에 지방 관청에서는 자신의 구역에는 주민들을 잘 구제하여 평화롭다는 것을 상부에 내세우면서 자신의 자랑을 하고 싶어했다. </div> <div>때문에 일부 지방 관청은 비참하게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상황을 일부러 숨겨서 조정에 구호물자를 요청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피하는 일도 있었다. </div> <div>이렇게 주민들의 구제에 공을 세웠다는 표창을 받기 위해 몰래 사망자가 없는 것으로 조작하고 포상을 떼어먹는 관원들이 지적당하기도 하였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10.</div> <div>조선시대에 정식으로 조정에서 논의된 사건 중에 가장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꼽는다면 </div> <div>1530년대를 무렵에 일어난 어린이에 대한 살인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div> <div><br /></div> <div>1531년 남대문에서 문안에서는 이상한 자루가 내던져진 채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div> <div>자루를 열어보니 안에는 10살이 조금 넘은 여자아이가 목이 잘려서 자루속에 담겨 있었다.</div> <div><br /></div> <div>발견된 여자아이의 머리를 보면 귀고리를 한 모습이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했다. </div> <div>하지만 한성부 판윤 윤은보는 시체를 검사해 본 결과 살인하여 죽은 시체인 것 같지는 않다는 의견을 내세우면서 </div> <div>그냥 땅에 묻어 버릴까 말까 망설이면서 <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시간을 보냈고, 그러는 사이에 사건은 영원히 잊혀져 버렸다.</span></div> <div><br /></div> <div>1533년 2월 17일. 감사로 재직하고 있던 김귀성(金貴成)의 집이자 무당의 집 뒤의 거리에 5~6세된 여자 어린아이 한 명이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div> <div>놀라운 것은 이 아이가 발이 잘린 상태였다는 것이다. 아이를 발견한 김귀성은 황급히 아이를 구조하여 관청에 보고했는데, </div> <div>어린아이는 말을 할 수 있었으므로, 자신의 이름은 "개춘(開春)"이라고 했고, 자신의 오빠가 있는데 그 이름이 "어리가이(於里加伊)"라고 했다. </div> <div>아이에게 발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그저 "칼로 내 발을 잘라내면서, 죽어라, 죽어라고 했어요"하고 대답했다.</div> <div><br /></div> <div>조사를 진행하자 한덕(漢德)이라는 종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한덕은 자신의 주인 집에 가다가 하반신에 동상이 걸린 아이를 발견했는데, </div> <div>아이가 불쌍해 보이고 마침 자신에게 아이가 없기에 데려가서 보살폈다고 했다. 그러나 한덕의 주인이 더러운 아이를 집안에 들여 놓을 수 없으므로 </div> <div>쫓아내라고 하기에 다시 거리에 버렸다는 것이다. 한덕이 이후의 소식을 들어보니, </div> <div>그 이웃 중에 궁궐 출신의 어느 집에서 데려갔다가 다시 버렸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div> <div>그 후에는 김별좌(金別坐)의 종인 연수(連守)가 다시 데려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한덕은 아이가 발이 잘린 이유는 모른다고 말했다.</div> <div><br /></div> <div>한편 조사 중에 중덕(仲德)이라는 종이 또다른 주장을 펼쳤다. 발견된 아이는 옥가이(玉加伊)라는 아이로,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div> <div>중덕은 지난해 9월 29일에 아이를 잃어버렸는데, 5개월 만에 문득 알 수 없는 아이가 발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본 즉, </div> <div>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것이었다.</div> <div><br /></div> <div>당시 이 아이는 조사 과정에서 처음으로 아이와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던 한덕이 곁에서 보살펴 주고 있었다. 사건의 조사를 담당하던 한성부에서는 </div> <div>다시 한 번 아이에게 직접 도대체 누가 발을 자르며 죽이려 했는지 물었다. 그때 한덕이 아이에게 죽을 먹여주고 있었는데, </div> <div>아이는 죽을 먹다 말고 죽을 먹여주고 있는 한덕을 바로 가리키면서, "이 여자가 내 발을 잘랐어요"하고 말했다. </div> <div>아이는 자신이 발을 잘릴 때 털모자를 쓴 사람을 보았다는 말을 했으므로, 한성부에서는 아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사람들을 </div> <div>각기 털모자를 씌운 모습으로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그 때 본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으나, 아이는 여기에는 실패했다.</div> <div><br /></div> <div>이후 의금부의 담당자들이었던 유보(柳溥)와 심언경(沈彦慶)이 직접 사건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div> <div>두 사람은 아이에게 무엇으로 발을 잘렸는지 물었고, 아이는 "칼이요." 하고 답했다. 두 사람이 어디서 발을 잘렸는지 묻자 아이는 </div> <div>"방 안에서" 라고 답했다. 언제 발을 잘렸는지 묻자 아이는 "낮에"라고 대답했다. </div> <div>두 사람은 아이 앞에 한덕과 중덕 두 사람을 동시에 데려와서 누가 발을 잘랐는지 물었는데, </div> <div>그러자 아이는 한덕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에요"하고 답했다. 아이는 "두 손을 묶고, 입을 솜으로 틀어막고 내 발을 잘랐어요"라고 답했다.</div> <div><br /></div> <div>아이의 발을 자른 범인은 한덕으로 굳어지는 듯 했으나, 사람들 간에 몇가지 석연찮게 말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div> <div>무당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라든가, 아이가 동상에 걸려 있어서 발이 썩어서 떨어져 나갔을 가능성이라든가 하는 점들이 </div> <div>의심스러운 점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최고의 의원들에게 아이의 발이 잘린 자리를 관찰하게 하여 썩어서 발이 떨어져 나간 것인지 </div> <div>잘려 나간 것인지 조사하게 하기도 했으나, 어린아이의 말만으로는 큰 죄를 속단할 수 있는 증거로는 부족하다는 쪽으로 맺어졌다. </div> <div>결국 이 사건은 아이의 말이 나이에 맞지 않게 일관되어 있고 정리정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div> <div>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영원히 묻혀 지게 되었다.</div> <div><br /></div> <div>이 사건을 계기로 어린아이를 잃어버리거나,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산 속에서 몰래 살인해버리거나, </div> <div>어린아이를 납치한 뒤에 몰래 종으로 삼아 노비로 기르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는 점이 문제거리로 중요하게 언급되기 시작했다.</div> <div><br /></div> <div>그러나 이상한 사건들을 이후에도 벌어졌다. 1546년에는 아직 어린 여자와 두 세살 바기 아기의 시체가 서울 거리에 굴러다니는 것이 발견되었다. </div> <div>시체는 온몸 이곳저곳이 불로 지진 참혹한 상태였고, 특히 아랫배와 배꼽 주위를 마구 지져 놓은 모양이었다. </div> <div>이 사건에 대해서는 시체를 발견한 집에서 다른 곳으로 몰래 시체를 옮겨 놓았다는 정도가 더 조사되었을 뿐, 이후에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div></div>

    이 게시물을 추천한 분들의 목록입니다.
    [1] 2013/11/12 21:24:37  112.162.***.55  복숭아맛사탕  235479
    [2] 2013/11/12 21:34:07  203.226.***.1  랑해  417708
    [3] 2013/11/12 21:44:27  110.11.***.145  gotmd  100915
    [4] 2013/11/12 22:14:50  65.49.***.183  어던히르텔트  493982
    [5] 2013/11/12 22:19:59  112.153.***.16  서땡깡  439216
    [6] 2013/11/12 23:27:57  222.251.***.113  순대킹  330929
    [7] 2013/11/12 23:33:12  223.62.***.67  하찮은촌놈  314265
    [8] 2013/11/13 00:14:20  211.36.***.124  명탐정짱구  455337
    [9] 2013/11/13 00:20:09  221.155.***.99  니니니  153143
    [10] 2013/11/13 00:37:38  175.223.***.75  호쿠토  474529
    푸르딩딩:추천수 3이상 댓글은 배경색이 바뀝니다.
    (단,비공감수가 추천수의 1/3 초과시 해당없음)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
    다음주부터는 방송 안 볼거같아요 [1] -아리아드네- 14/01/12 00:31 38 1
    10
    (펌, 스압있어요!) 내가 겪은 귀신이야기 10~14편 -아리아드네- 13/11/24 22:27 80 0
    9
    (펌) 내가 겪은 귀신이야기 7~9편 -아리아드네- 13/11/24 22:12 54 2
    8
    (펌) 내가 겪은 귀신이야기 1~3편 -아리아드네- 13/11/22 23:34 61 2
    7
    (펌) 내가 겪은 귀신이야기 1~3편 -아리아드네- 13/11/22 23:23 83 0
    6
    (펌) 바다신 -아리아드네- 13/11/22 21:33 113 1
    5
    (펌) 노래방 아르바이트 -아리아드네- 13/11/22 20:56 182 1
    (이글루스 펌) 실록을 떠도는 어둡고 참혹한 이야기 10선 사월토끼 13/11/12 20:14 157 0
    [1] [2] [3]
    단축키 운영진에게 바란다(삭제요청/제안) 운영게 게시판신청 자료창고 보류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모바일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