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지면 공익도 바로 군대에 소속이 됩니다.
공익이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전시에 여러가지 필요한 곳이 많은데다 장병수가 모자랄시 공익 또한 전투에 참여해야 한다고 알고있습니다.
남자라면 실제로의 근무보다 그런 정신상태가 중요하다고 여겨지기에 전시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인내는 기본으로 가지라는 의미일겁니다.
그리고 제가 일개 병장 제대지만
여자도 군대가라는 것은 좀 힘들지 않을까요?
이스라엘을 많이들 생각하실텐데 그곳의 상황과 한국은 여러가지 상황이 많이 다를겁니다. 자세한건 모르겠지만
중요한건 여자가 현역을 간다는건 국방비가 더 많이 들고 그만큼의 전투력 향상을 뽑아낼수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지만 기본적인 신체특성상 유리하고 불리한것에 대한 이해가 없는 분은 안계실테죠.
최신식의 무기들은 그렇게까지 실 전투인원이 많이 필요한것은 아닙니다.
산악지대라고는 하나 대대와 대대, 중대와 중대간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장거리 무기로써 싸움의 대부분이 결정지어질 겁니다.
여태까지의 정부의 방침은 여성은 의무적인 군복무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조선이래 남존여비의 사상도 작용했겠지만요.
개인적으로 여성의 공익복무는 찬성합니다만 그다지 공적인 임무에 여성이 필요한 곳이 많이 없겠죠.
육아시설에서의 복무 등등을 많이들 제안 하시던데 사회봉사라면 모를까
육아는 택도없습니다.
첫 아이를 가진 여성이 사전에 준비와 마음가짐을 하지 않으면 육아에 얼마나 헤매는지 아실분은 아실겁니다.
아이를 키운다는것은 장병들이 군교육을 받듯이 교육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아닙니다.
무한한 애정이 필요한 일인데 그런 경솔한 의견이 나오다니 댓글러의 무지에 난감해지더군요.
결론은
공익 또한 휴전국가인 한국에서의 필요성은 실용성 뿐만아니라 정신상태를 포함하는것이며
여성이 복무하지 않는 현 시점에서의 정부정책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일수 있다는 겁니다.
아름다운 이성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얼굴을 보고 싶거든 정면으로 당당하게 보고
옆에서 엿보지 마라.
성철 스님의 주례사 
오늘 두 분이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결혼하기를 원해놓고 살면서는 아이고 괜히 결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할 걸 후회하는 마음을 냅니다. 
이 결혼 할 때 마음이 어떠냐? 선도 많이 보고 사귀기도 하면서 
돈은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떻나? 성질은 어떻나? 건강은 어떻나? 
이렇게 다 따지고 이리 저리 고릅니다. 
손해 볼 마음이 논꼽 만큼도 없습니다. 
이렇게 골랐다는 것은 덕보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덕보겠다는 마음이 살다보면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아내는 30%주고 70% 덕보자고 하고 남편도 30%주고 70% 
덕보자고 합니다. 
둘이 같이 살며 70%를 받으려고 하는데 실제로는 30%밖에 못 받으니까 
살다보면 십중팔구는 결혼을 괜히 했나, 속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덕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떨까요? 
아이고 내가 저분을 좀 도와줘야지, 저분 건강이 안 좋으니까 내가 평생 
보살펴 줘야겠다. 저분 경제가 어려우니 내가 뒷바라지해 줘야겠다. 
아이고 저분 성격이 저렇게 괄괄하니까 내가 껴안아서 편안하게 
해 줘야겠다. 
이렇게 베풀어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면 길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덕보겠다는 생각으로 고르면 백 명중에 고르고 고르고 해도 
막상 고르고 보면 제일 엉뚱한 것을 고르게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부터 덕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덕 봤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 줘야겠다고만 
다짐하면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제가 말로 부조를 하니까 두 분이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매일 밤마다 반복되는 그리고 번복되는 어제의 각오는 잊은 채 
시시한 욕구를 채우려고 너 스스로와 했던 약속을 기만하고 모욕하고 비웃었지.
굳은 다짐으로 쓰여졌던 약속의 증서는 휴지조각으로 버려지고 또다시 내일을 외치며 도대체 언제쯤 관둘지 모르는 그 공허를 외치며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애써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거적으로 덮어놓고선
남이 쌓아올린 탑을 남들에게 뽐내는 역겨운 대리만족을 넘어, 마치 그 주인이라도 된 양 허세를 부리는구나.
부끄러움은 잊은지 오래- 오히려 민망할 정도로 당당하다.
검은 밀물은 매섭게 밀려드는데 모래성은 높아져만 간다.
꿈은 화려하기 그지 없는데 어째서 시궁창에서 한심한 꼴로 허우적대는가.
그래놓고 후에 가서 이상의 날개는 현실에 의해 꺾이어졌다는 되지 않는 감상을 늘어놓을 것인가.
시간보다 빠르게 달려야 하는데 어째서 뒷걸음질만 치는가 - 바로 뒤엔 절벽있는데
지금 네가 즐기는 그 쾌락이 죄 많은 너의 가슴을 찢는 고통으로-
그리고 수십배는 더 고통스러울 죄 없는 어머니의 소리없는 오열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 어째서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으로 그렇게 퇴보를 반복하는 것인가. 
.
.
.
들어라.
하루의 절반을
눈물로 지워본 적이 없는 이들아.
또한
들어라.
노력없는 희망만큼이나 
또 절망적인 것은 없음을 아직 모르는 이들아.
언젠가는 가장 비참하게 찢길 오만과
지독한 비린내를 풍기는 나태로 찌들어
이제는
끝없이 내일만을 되뇌이는
그 검은 입으로
감히 
너의 꿈을 모욕하지 말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알프레드 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