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아버지는 사이비 교주 (10)<br><br><br><br>“매형은?”<br><br>“출근했어.”<br><br>“토요일인데?”<br><br>“응, 다음주에 공판 시작인데 증인이 어제 저녁에 진술을 바꿨대. 그래서 증거물이랑 서류 작업을 다시 해야 한다고 하더라.”<br><br>“많이 바쁘네.”<br><br>“아까 통화했는데 내일도 출근할 것처럼 말하던데… 에휴—! 그래도 저녁은 집에 와서 먹을 거라고 했으니까, 기다렸다 너도 같이 먹고 가. 올 때 됐어.”<br><br>누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br><br>“밥은 됐고 혹시 집에 생강차 있어?”<br><br>“흠… 아마 있을 걸?”<br><br>“그럼 그거나 한 잔 타줘.”<br><br>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물었다.<br><br>“진하게?”<br><br>“아니, 그냥 적당히.”<br><br>나는 주방으로 향하는 누나를 향해 말을 이었다.<br><br>“그런데 입구에 비번은 언제부터 생긴 거야?”<br><br>누나가 살고 있는 아파트 입구의 공동 현관문을 말하는 거다. <br><br>100여 세대가 거주하는 복도식 아파트의 공동 현관문이라 그동안 비밀번호 잠금 장치가 없었거든.<br><br>“아, 그거? 지난주 주말에 와서 설치했으니까 딱 일주일 됐네.”<br><br>누나는 내가 앉아 있는 소파 뒤에 설치된 인터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br><br>“저 손바닥만 한 거 달아주면서 70만원이나 내라고 하더라. 에휴—! 도둑놈들.”<br><br>“헐, 엄청 비싸네.”<br><br>누나는 전기 포트에 물을 담아 전원을 올렸고, 냉장고 안쪽에서 생강차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며 나에게 말했다.<br><br>“그런데 갑자기 왠 생강차? 너 감기 걸렸니?”<br><br>“아니, 감기는 아니고 버스에서 멀미가 좀 나서.”<br><br>석륜도에서 오는 배에서 속이 울렁거려 혼났는데, 배에서 내렸을 때에는 가라앉았다가 누나 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다시 멀미가 시작해 지금까지 속이 좋지 않았거든. <br><br>누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br><br>“너는 그 나이를 먹고 아직도 차멀미를 하니?”<br><br>“그러게 말이야.”<br><br>잠시 후 누나는 플라스틱 쟁반 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컵을 가져왔고, 나는 컵을 양손으로 받아 생강차를 한모금 입에 머금었다. <br><br>어우, 너무 진하다. <br><br>칼칼한 생강차가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느낌과 함께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다. <br><br>누나는 쟁반을 거실 탁자에 내려놓았고, 소파 옆자리에 앉으며 작은 노란색 상자를 나에게 내밀었다.<br><br>“며칠 전에 네가 말했던 거.”<br><br>나는 상자를 받아 내용물을 확인도 않은 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br><br>“땡큐.”<br><br>“그런데 그건 왜 찾은 거야?”<br><br>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누나의 표정을 살폈는데, 예상했던 대로 이건 쉽게 끝날 질문이 아니다. <br><br>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br><br>“그냥, 엄마 생각이 좀 나서.”<br><br>“얼씨구? 김영식, 네가 엄마 생각을 할 때가 있어?”<br><br>나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양쪽 어깨를 으쓱했다.<br><br>“곧 엄마 기일이잖아.”<br><br>누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br><br>“엄마 기일 핑계는… 그 여자 맞지? 정서적 부유함.”<br><br>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느긋한 움직임으로 생강차가 담긴 머그컵을 입에 가져다 댔고, 누나는 살짝 목소리를 높여 말을 이었다.<br><br>“김영식, 너 그거 아무한테나 함부로 주면 안되는 거 알지?”<br><br>나는 생강차를 목에 넘기고는 다시 양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br><br>“주면 또 어때? 어차피 쓸 사람도 없는데.”<br><br>누나는 오른손을 들어 엄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br><br>“나 있잖아, 나!”<br><br>“에이, 누나는 돼지 손이라 맞지도 않잖아.”<br><br>“이 자식이, 뭐라고?”<br><br>누나의 오른팔이 허공에 올라가는 사이, 나는 머그컵을 들어 누나의 팔을 막는 시늉을 했다.<br><br>“브라더, 나 때리면 이거 여기 소파에 쏟을지도 몰라.”<br><br>올 봄에 누나가 무려 650만원을 들여 장만한 진한 감색 스웨이드 소파였다. <br><br>이탈리아 나폴리에 유명한 가구 장인이 우루과이산 천연 소가죽으로 만든 수제 소파가 특가로 나왔다나 뭐라나… 아무튼 매형 말로는 처음 석 달 동안 소파에 앉아 물도 못 마시게 할 정도로 누나가 유난을 떨었다고 한다. <br><br>누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br><br>“어휴—! 너 정신 똑바로 차려. 그 여자 진짜로 조심해.”<br><br>나는 결국 누나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br><br>“하, 진짜… 1 절만 해라, 1 절만! 응!”<br><br>하지만 누나도 지지 않는다.<br><br>“너 예뻐서 해주는 말이 아니라, 내가 경험자라서 하는 말이야.”<br><br>“경험자?”<br><br>“그래, 네 매형도 나한테 비슷한 말을 했거든. 내가 아주 그말에 홀라당 넘어갔지, 에휴—!”<br><br>“매형이 뭐라고 그랬는데?”<br><br>“네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고, 누나가 하는 말이나 잘 새겨들으라고.”<br><br>누나의 표정으로 미루어 잔소리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br><br>특히 은경이 자신보다 무려 6살이나 많다는 사실을 알면 거품을 물고 나를 설득하려 들지도 모른다. <br><br>일단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br><br>“네엡—! 누님의 주—옥 같은 말씀 잘 새겨듣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나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br><br>“뭐?”<br><br>나는 생강차 한모금을 입에 넘긴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br><br>“예전에 누나가 이야기하던… 엄마 느낌 있잖아? 그거 요즘에도 느껴져?”<br><br>누나의 두 눈이 커졌다가 이내 가늘게 변했다. <br><br>그리고 누나는 잔뜩 경계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br><br>“그걸 왜 물어보는데?”<br><br>누나의 예민해진 표정에 나는 애써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br><br>“그냥. 별 건 아니고, 오늘 가만히 생각을 하다 보니까… 한가지 집히는 게 있어서.”<br><br>“허! 김영식, 네가 생각이라는 것도 하고 살아?”<br><br>가시돋친 누나의 반응을 이해한다. <br><br>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그러니까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와 우리와의 조금은 어색한 동거를 막 시작했을 때였다. <br><br>누나는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엄마가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하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누나에게 정신 차리라며 꽤 심한 말까지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br><br>그렇다고 내가 굽히고 들어갈 생각은 없다.<br><br>“뭐, 듣기 싫으면 말고.”<br><br>누나는 한참을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누나의 시선을 외면한 채 다시 생강차 한모금을 목에 넘겼다. <br><br>울렁거리던 속이 이제 한결 부드러워졌다.<br><br>“후우—! 이 집 생강차 효과가 좋구만.”<br><br>나의 말에 누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br><br>“알았어. 말해 봐. 오늘 무슨 생각이 들었는데?”<br><br>“내가 먼저 물었으니까 누나부터 말해. 엄마 느낌, 그거 요즘에도 느껴져?”<br><br>누나는 오른팔을 들어 당장이라도 내 뒤통수를 쥐어박을 것 같은 자세를 취했지만,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때리지는 않았다. <br><br>그리고 분을 삭히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br><br>“그 집에서 나온 다음부터는 거의 안 느껴져.”<br><br>“그 집이라면… 예전에 살던 수산동 집?”<br><br>누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누나에게 다시 물었다.<br><br>“그럼 나 입대 한 바로 다음이네?”<br><br>“그렇지. 너 군대가고 아버지랑 집 정리하기로 결정한 거니까.”<br><br>믿을 수 없지만… 내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br><br>후—!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고, 들이 마신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누나에게 물었다.<br><br>“그럼 혹시… 예전에 그 집 새주인 귀찮게 한 게 그거 때문이었어?”<br><br>군 시절 휴가를 나갔을 때 누나의 부탁으로 수산동 집 새로운 주인과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통화 연결되고 그 사람 첫마디가 집 절대 안 파니까 그만 좀 괴롭히라는 말이었거든. <br><br>나의 물음에 누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br><br>“그래, 맞아.”<br><br>“그리고 수산동 집에서 나온 다음부터 거의 안 느껴진다는 말은 뭐야? 느낀 적이 있기는 있다는 뜻이잖아.”<br><br>누나는 나를 잠시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br><br>“나 결혼하던 날……. 그날… 결혼식장에 엄마가 온 게 느껴지더라……. 신부 입장할 때부터 피로연이 다 끝날 때까지… 엄마가 거기에 쭈욱 같이 있었어….”<br><br>누나의 두 눈을 붉게 충혈되었고, 나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br><br>그때 아버지는 누나의 결혼식 날짜와 장소를 분명 알고 있었다. <br><br>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고, 누나에게 어떻게 설명을 할지 단어를 고르는 중에 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br><br>“그리고 하나 더 있는데…….”<br><br>“뭔데?”<br><br>“원주에 엄마한테 가면 느껴져.”<br><br>엄마의 유골함이 있는 원주의 추모공원을 말하는 거다. <br><br>누나의 말에 생각이 꼬여버렸고, 잠시 후 나는 결국 낮은 탄식음을 내뱉고 말았다. <br><br>석륜도에서 오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br><br>하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br><br>헛웃음이 나오는 걸 애써 참는 사이 누나는 말을 계속했다.<br><br>“그런데 원주에서 늘 느껴지는 건 아니고… 엄마 기일 날에만 느껴지더라.”<br><br>“그렇구나.”<br><br>“그리고…….”<br><br>누나는 주저하는 표정으로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br><br>“그리고 뭐?”<br><br>누나는 짧게 한숨과 함께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br><br>“결혼하고 이 집으로 이사온 다음부터 가끔씩 느껴질 때가 있어. 아주 가끔씩, 짧게 한 10 분 정도? 그리고 마지막은… 아마… 한 달 전이었나? 그때는 늦은 밤이었는데 꽤 오래 느껴졌던 거 같아.”<br><br>진지한 표정의 누나와는 달리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br><br>“그래, 그랬구나.”<br><br>나는 머그컵에 남은 생강차를 입안에 털어넣었고, 누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br><br>“그래서 네가 오늘 생각했다는 건 뭔데?”<br><br>“아, 그거….”<br><br>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br><br>“그런데 누나 이야기 듣고 보니까 내 생각이 틀린 거 같아.”<br><br>나의 말과 동시에 누나의 표정이 굳어졌다.<br><br>“뭐? 너 지금 장난하냐?”<br><br>“설마하니 내가 그런 걸로 장난을 칠까.”<br><br>누나는 도끼 눈을 뜨며 말했다.<br><br>“그럼 뭔데? 김영식, 말해!”<br><br>내 생각이 맞다면야 당연히 누나에게 알려주겠지만,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마당에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br><br>이걸 말하려면 일단 은경 이야기를 꺼내야 하고, 은경 이야기가 나오면 누나는 일장 잔소리를 쏟아낼 텐데, 오늘은 내가 그걸 받아 낼 자신이 없다. <br><br>그렇다고 지금 살기등등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누나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걸 어쩐다. <br><br>그때였다.<br><br>-삑삑, 삑, 삑삑삑삑—!<br><br>현관문의 도어락 버튼 누르는 소리였다. <br><br>순간 일그러졌던 누나의 표정이 스르륵 펴졌고, 철컥! 하고 문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누나는 용수철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br><br>“자기야— 이제 온 거야—?”<br><br>거실 맞은편 현관문 쪽에서 매형과 누나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고, 한 옥타브 올라간 누나의 목소리 때문인지 가라앉았던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젠장…!<br><br><br><br>(다음편에 이어집니다.)<br><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