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 </div> <div style="text-align:left;"> <div style="text-align:left;"> <div style="text-align:left;"><img style="border:;width:515px;height:403px;" alt="hideyoshi_koudaiji.jp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406/1403788530qgYTWZYgSGJUguxeG1NWaHfWEl1.jpg"></div></div></div> <div> </div> <div> </div> <div>1590년, 히데요시는 새로운 계획을 포회하고 있었다. </div> <div> </div> <div> </div> <div>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조선, 중국, 필리핀 정복사업이었다.</div> <div> </div> <div>히데요시의 진짜 저의는 중국이었지만, </div> <div> </div> <div>그러기 위해선 조선정벌이 선결 과제였다. </div> <div> </div> <div>조선은 중국 침략에 필요한 경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리핀은 나중에 착상한 것이었다. </div> <div> </div> <div> </div> <div>필리핀이 정복대상에 들어가게 된 주요한 이유는 </div> <div> </div> <div>스페인인들의 소규모 수비대를 쳐서 평정하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라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div> <div> </div> <div>〔그 보고내용은 확실히 정확하다. 만약, 히데요시가 공격명령을 조선에서 필리핀으로 바꿨다면, </div> <div> </div> <div>1592년 이후에 마닐라가 니혼진마치日本人町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군사역사가들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class="chimg_photo" style="border:;width:627px;height:357px;" alt="DSC_8910.jp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406/1403788557uzUOBHCJ9PWPB83NQ4B9Dmn8F4T4OA.jpg"></div> <div> </div> <div><br>이런 나폴레옹같은 정복전쟁에 있어서 </div> <div> </div> <div>조총의 효용성이 칼과 창이 낳는 단순한 영웅주의Heroism를 압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div> <div> </div> <div>사실, 거의 그 대로였다. 일본인은 무사와 아시가루의 혼합부대로 조선에 출병했으나, </div> <div> </div> <div>소지하고 있던 무기같은 것이 제각기 달랐다. </div> <div> </div> <div>부대의 대다수는 무사로서, 전통적인 양도(가타나와 와키자시) 이외에 최소한 활이나, 창을 휴대했다. </div> <div> </div> <div>다른 군대의 대다수는 뎃포를 보유했다. </div> <div> </div> <div> </div> <div>※최초의 침략부대 16만명 가운데 거의 <strong>1/4</strong> 정도가 조총부대였다고 여겨진다.</div> <div> </div> <div><br>※ 원정군은 봉건영주의 군대로서 각지의 다이묘가 부하의 장비, 의류 등에 책임지고 있었다. </div> <div> </div> <div>그 때문에 각 다이묘 군대의 무기구성이 일정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div> <div> </div> <div>중심지역에서 건너간 비교적 유복한 다이묘(영주)중에는 족히 4할에 달할 정도의 부하들이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div> <div> </div> <div>그 외에 비교적 변경 지역에서 건너갔던 다이묘의 경우에는 </div> <div> </div> <div>스코틀랜드의 아가일Argyle 백작처럼 실제 1명의 뎃포부대원도 갖추지 못한 자도 있었다.</div> <div> </div> <div> </div> <div><br>예를 들면,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군세 2,600명을 이끌고 조선에 건너갔지만, </div> <div> </div> <div>그 중 200명이 갑주를 착용한 기마무사, </div> <div> </div> <div>1,700명은 말이 없는 무사이며, 후자의 대다수는 장창을 휴대하고 있다. </div> <div> </div> <div>다치바나군의 남은 부대는 350명의 뎃포부대원과 90명이 채 못되는 활부대였다. </div> <div> </div> <div> </div> <div>한편, 큐슈 섬의 군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div> <div> </div> <div>거의 같은 수의 기마무사를 이끌었으며, </div> <div> </div> <div>또 1천 여명의 뎃포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창을 가진 자는 실제적으로 한 명도 없었다.</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width="574" height="318" style="border:;" alt="3 (1).pn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406/1403788622vDieVjzqkHOzM3QKVc.png"></div> <div style="text-align:left;"> </div> <div> </div> <div>16세기 일본의 군대에서 보급계 공급을 어떻게 다뤘는가? 이 문제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던 것은 확실하다.</div> <div> </div> <div><br>조선 침략으로부터 수 개월간은 당초에 생각한 바대로 일본군의 제각기 다른 무기가 제대로 기능했다. </div> <div> </div> <div>조선군은 조직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침략군은 돌도끼를 가지고도 승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div> <div> </div> <div>실제로 침략군은 대승했다. </div> <div> </div> <div>일본 무사는 조선의 기사와 칼ㆍ창으로 싸웠을 때 쫓아내 버렸으며, </div> <div> </div> <div>아시가루 조총부대는 잔당을 소탕했다. </div> <div> </div> <div>선발대가 부산에 상륙한 때로부터 서울을 함락시킬 때까지 겨우 18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div> <div> </div> <div>일본인이 조선의 조총부대에게 살해될 정도의 위기는 전무했었다. </div> <div> </div> <div>왜냐면, 조선인은 조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style="border:;width:570px;height:303px;" alt="1615103.jp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406/1403788657lT7cX1ArBrMjz6lEtPDOTVgkS7bp9D.jpg"></div> <div><br> 조선인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꽤 비능률적인 소형포였다. 중국에서 전래되었던 것이었다. </div> <div> </div> <div>그러나 일본 뎃포부대는 이것을 어렵지 않게 박살내었고, 조선의 궁수부대를 소탕했다. </div> <div> </div> <div>이것은 가장 이상적인 전쟁이었다. 일본 무사는 일대 영웅이 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div> <div> </div> <div>아시가루 쪽도 기술적으로 우위에 서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div> <div> </div> <div> </div> <div>일본군은 조선의 견인포를 대량으로 노획하여 매우 기뻐하였으며, </div> <div> </div> <div>무장 가토 기요마사는 몇 십 문 정도를 토산물로서 일본에 보냈다. </div> <div> </div> <div>조선의 대포 길이는 2ft(약 61cm) 정도 밖에 안되었으며, </div> <div> </div> <div>한 발 한 발 장전시간 간격이 필요했으며, 대리석과 같은 돌을 쏘았다.</div> <div> </div> <div>그런 것들이라도 스코틀랜드 하이랜더들이라면 두려워했으므로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그러나, 16세기 일본인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width="512" height="384" style="border:;" alt="64bd0c4f0ab9464b0dabcb974cd7a424.jp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406/1403788852xOIFuZM8kkb.jpg"></div> <div><br> </div> <div>그러나, 중국이 조선에 구원군을 대거 투입하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div> <div> </div> <div>특히, 일본군에게 힘들었던 것은 조선 출병 2년째에 조선인 부대가 자국제 화승총을 가지고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div> <div> </div> <div>그 화승총은 조선군이 노획한 약간의 일본 조총을 조선 북부의 대장장이들이 모방 제작한 조선제 조총이였다.</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그것은 무사를 쏘아 죽이는 능력을 완벽하게 갖춘 것이었다.</div> <div> </div> <div><br>※ 조선은 일본보다도 현격하게 떨어지는 기술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div> <div> </div> <div>20세기에 들어서기까지 특히 여기서 말하는 화기생산에 뛰어들지 못했다. </div> <div> </div> <div>그러나 조선군은 1592년 이후에는 화승총이 굉장한 무기라는 것을 인식했던 것이다. </div> <div> </div> <div>조선에서의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출판된 조선 최초의 화승총 안내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div> <div> </div> <div>「중국에는 이와 같은 화기가 없었다. 이것은 일본 야만인들로부터 손에 넣은 것이다. </div> <div> </div> <div>그것은 온갖 다른 종류의 화기와 다른 느낌이다. 양질의 것은 갑옷을 관통하며, 사람을 쏘면 가슴을 꿰뚫는다. </div> <div> </div> <div>500ft(약 152.4m) 떨어져 있는 지점의 버드나뭇잎, 금속화폐 구멍에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의 것이다. </div> <div> </div> <div>말 위, 땅 위를 가리지 않고, 뎃포의 유능함은 창에 비교하면 10배 이상, 활에 비교해도 5배 이상이다」</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style="text-align:left;"> <div style="text-align:left;"><img class="chimg_photo" style="border:;width:701px;height:309px;" alt="Siege_of_Pyongyang_1593_02.jp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406/1403789142BRbO1rKqTxgNF6sOEz79W8ThQgWk8.jpg"></div> <div style="text-align:left;"> </div></div> <div><br>이번에는 다수에 소수라 일본군은 중과부적으로 압도되어, 조선 쪽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div> <div> </div> <div>그리하여 일본의 여러 무장들 가운데는 전군에 조총을 보유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div> <div> </div> <div> </div> <div>1590년대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2~3통의 편지에는 그러한 견해가 꽤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div> <div> </div> <div> </div> <div>하나는 1592년, </div> <div> </div> <div>조선 전역에 궁수부대 약 1,500명, 조총부대 약 1,500명, 창 부대 약 300명을 이끌었던 </div> <div> </div> <div>지방 다이묘가 가신 앞으로 써보냈던 편지에서 무기 구성의 변경을 희망하면서,</div> <div> </div> <div>「조총과 탄약을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하라. 창은 전혀 필요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br></div> <div>이 때는 이미 나가시노 전투로부터 17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div> <div> </div> <div>따라서 뎃포가 창보다 우수하다는 것은 고국의 가신에게는 특별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을 것이다. </div> <div> </div> <div>새로운 것은 주군의 조총에 대한 태도 변화다. </div> <div> </div> <div>이와 관련하여 일본에는 아직 보낼 수 있는 뎃포가 충분했다.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style="border:;width:535px;height:366px;" alt="merchantofvenice.jp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406/1403789250LG69GnfC7s5C.jpg"></div> <div> </div> <div>플로렌스의 상인 프란체스코 칼렛초는 조선 전쟁〔임진왜란〕이 가장 가혹하기 그지없었던 1597년에 </div> <div> </div> <div>일본 선박을 타고서 필리핀을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 </div> <div> </div> <div> </div> <div>칼레초가 나중에 대공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에게 보낸 보고를 보면, </div> <div> </div> <div>일본인은 그 때 이미 약 30만명〔임진왜란 약 16만명, 정유재란 약 14만명]이 조선에 출병하였지만, </div> <div> </div> <div>그래도 아직 일본에는 많은 무사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div> <div> </div> <div>그 대부분이 조총을 1정 내지 2정 정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div> <div> </div> <div>이것을 칼렛초는 사냥에 초대되었을 때에 발견했다.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무사는 전장터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칼이나 활을 좋아하면서도, 기러기ㆍ꿩ㆍ오리를 쏠 때는 조총을 애용했으며,</div> <div> </div> <div>「사무라이는 이런 야생 조류를 조총으로 한 방에 죽인다」고 페르디난도 대공에게 써보냈다.</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br> </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style="border:;width:571px;height:378px;" alt="흥남철수작전.jp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406/1403789345RU4itUwzoI.jpg"></div> <div> </div> <div>또 다른 한 통의 편지는 조선 전쟁이 끝날 무렵에 작성된 것이다. </div> <div> </div> <div>그보다 먼저, 일본군은 일단 압록강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한 뒤, 지금은 그 때 이후로 중국군 때문에 퇴각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div> <div> </div> <div>─ 그 양상은 350년 뒤, 한국전쟁 때의 미국인들과 꽤 유사한 부분이 있다. </div> <div> </div> <div>이와 관련하여 그 때도 중국 인구는 세계 총인구의 1/4였다.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width="574" height="580" style="border:;" alt="12 (1).jp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406/1403789427hppfAXfY8VJEqd7mMhkR.jpg"></div> <div style="text-align:left;"> </div> <div> </div> <div>무장 아사노 요시나가는 수치상 압도적으로 우월한 중국ㆍ조선 연합군에 밀려 울산성에서 막고 있었으며, </div> <div> </div> <div>아사노는 아버지 앞으로 무기 조달을 청하며</div> <div> </div> <div>「가능한 보낼 수 있을 만큼의 조총을 보내주십시오. 다른 것들은 필요 없습니다. </div> <div> </div> <div>무사들은 하나같이 전원이 조총을 지참하고 오도록 엄명해 주십시오」</div> <div> </div> <div>라고 편지에 쓰고 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div> <div> </div> <div> </div> <div>아사노 가문의 가신도 지금 16세기 후반〔조총의 시대〕의 큰 물결에 자신을 기대고, </div> <div> </div> <div>그 한가운데에 억지로 끌려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div> <div><br><br><br><br> </div> <div> </div> <div>철포를 버린 일본인</div> <div> </div> <div>- 노엘 페린 저 <br><br><br><br><br><br><br><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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