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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history_22135
    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4
    조회수 : 3009
    IP : 39.7.***.34
    댓글 : 13개
    등록시간 : 2015/07/20 22:04:12
    http://todayhumor.com/?history_22135 모바일
    조선시대 재해에 대한 임금의 행동들(태종,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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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었던 봄가뭄이 지나갔네요.

    조선시대에 가뭄에 대한 태종과 세종임금의 기록들을 살펴 봅니다.

    (블로거 글 그데로 퍼왔더니 줄 간격이 좀 안맞네요^^;)



    ⁠[태종 임금]

    □ 이복 동생들도 죽이고 처남들도 죽여 버린 터프가이 태종 임금.

    그러나 태종 임금도 백성에 대한 사랑은 무엇 보다도 강한 임금이었음.


    태종 2년(1402년 임오) 6월 1일

    벼가 한참 파릇파릇 할 때임. 임금이 신하들에게 금년의 농사 작황을 물어봄.

    하윤 대감이 전반적으로 풍년이지만 다만 경상도전라도만은 이른 가뭄[早旱]으로 인하여 지난해만 못하옵니다. ”라고 대답함.
    그러자 임금이 “지난해에는 5월 20일에 비가 내렸어도 오히려 농사가 잘 되었는데, 하물며 금년에는 5월 초8일에 큰 비가 내렸는데도 그렇단 말인가?” 라고 역정을 내심.
    작년 가뭄 끝에 비가 내린 날짜까지도 기억하는 임금. 보기보다 서세한 남자였음.
     

    □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 이문화(李文和)가 비도 오지 않고 가뭄이 든것이 자기 책임이라 하여 사직하기를 청함.

    조선시대는 경상도에 비가 오지 않는게 경상도 관찰사의 책임이었구나...

    당시에 관찰사 레벨까지는 임금의 대리인 성격이 강하였음.

    태종 임금 “대저 가뭄은 과인(寡人)이 부른 것이요, 경의 죄가 아니다.”하며 사표 수리를 거부 함.

     
    □ 태종 2년(1402년 임오) 
    5월에 비가 찔끔 오고는 더 이상 비가 오지 않았나 봄.
    태종 임금께서 “지금 하늘이 비를 주지 않는 것은 부덕(否德)한 내가 왕위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왕위를 사양하고자 한다.”
    하고, 눈물을 흘리심. 옆에 있던 신하들도 같이 눈물을 흘림.
    가뭄 때문에 고통 받을 백성들을 생각하며 임금도 울고 신하들도 울고...
    태종 임금 “요사이 무슨 일이 미편(未便, 부족하거나 소홀하거나)한가? 죄없이 형벌을 받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묻고는 고생하고 있는 당번으로 올라왔던 궁궐 외곽 수비군 일부를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여러가지를 살핌.
    그날 해가 한낮이 되어도 아침도 점심도 들지 않았다고 함.
     
     
    □ 몇 해 후 5월 어느날
    이때도 좀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나 봄.
    그래서 태종 임금은 가뭄이 심함을 근심하여 어선(御膳. 임금의 밥상 반찬)을 줄이고 풍악을 폐하며, 혹 낮에 한끼만 들기도 하여 20여 일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가 흡족히 내림.
    모두들 기쁜 마음에 의정부에서 예궐(詣闕)하여 약주(藥酒)를 올리니, 임금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아니하심.
    비가 좀 내렸다고 경솔해지면 또 다시 재해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임금의 근심이었음.
    신하들이 청하기를 두세 번에 하자 마지못해 딱 한잔 하셨다고 함.
    □ 태종 10년에 또 가뭄이 심했나 봄.
    이번에는 좌정승 성석린(成石璘)이 사직서를 제출함.
    고위 관료들이 늙고 둔해서 재해가 발생 하고 있으니 사표를 받아 주십사함.
    임금이 말하기를,
    수한(水旱)의 재앙(災殃)은 실로 나의 부덕(否德)한 소치이다. 옛날에 하윤(河崙)이 수상(首相)이 되어 법령(法令)을 개수(改修)하였었는데, 그 당시 수한(水旱)의 재앙이 하윤이 정승자리에 있어 사람들이 가리켜 비방하였었다. 그 뒤에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 이서(李舒)로 하여금 계속하여 정승(政丞)을 삼았는데, 수한의 재앙이 없는 해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 증험(정승의 책임이 아니라는)이다. 내가 부덕(否德)하여 천심(天心)에 답(答)하지 못해서 수한이 여러 번 이른 것이다. 그런, 나는 진퇴(進退)가 어려워서 오랫동안 이 자리에 처하여, 근심하고 부지런하고 두렵게 생각하여 광구(匡救)하는 덕(德)을 힘입어 끝을 도모하기를 생각한다. 경의 몸이 비록 늙었으나,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體得)하여 물러가 쉬지 말라.”고 근엄하게 이야기 하심. 님 혼자 발 뺄 생각은 하지 마라며 사표수리를 거부함.

     

     

    [세종 임금]

    □ 세종 1년(1419년 기해) 6월, 또 가뭄이 심함.

    청년 임금 세종께서 대언들에게 이르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니, 정사의 잘못함이 없는가 널리 옳은 말을 구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하니, 대언들이 아뢰기를,
    “착한 말을 구하는 것은 임금의 미덕입니다. 마땅히 왕지를 내리시어 옳은 말을 구하소서.”
    하니, 임금이 대언들로 하여금 구언(求言)하는 교서를 기초하게 하였다. 교서에 이르기를,
    내가 부왕이 중하게 부탁하심을 받들어 나라 다스리기에 성심을 다해서 풍년이 들고 평화롭기를 바랐더니, 돌이켜 생각하건대, 덕이 부족하여 천심을 받들지 못하였는지 왕위에 임한 처음부터 놀라운 한재를 당하여, 기도 드리기를 간절하게 하였으나, 조금도 비가 내릴 징조가 없으니, 아침 저녁으로 삼가고 두려워해서 몸둘 바를 알지 못하는지라, 바르고 충성된 말을 들어서 재변이 풀리기를 원하노니, 대소 신료(臣僚)와 한량(閑良) ·기로(耆老)는 각각 마음에 생각하는 바를 다 말하여, 이때에 정사의 잘못된 것과 생민의 질고를 숨김없이 다 진술하여, 내가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애휼하는 뜻에 부합하게 하라. 그 말이 비록 사리에 꼭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죄주지는 않으리라.”
    하였다.
     
    □ 세종 3년(1421년 신축) 5월
    임금이 정사를 보았다. 이때 오래 가뭄이 들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상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면 잠시도 즐거이 놀이할 수 없다. ’하시니, 그와 같이 가뭄을 근심하시는 마음이 지극하신데, 하늘이 어찌 오래 가물어 비를 내리지 않을까.”라고 함.
    세종 대왕께서는 아버지 태종과 달리 스스로 겸손하고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는데도 가뭄이 드는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함.​
     
    ​□ 조선 시대 초기에는 지방의 일반 백성들이 타 지역으로 다닐때는 여행허가증명서가 있어야 함
    하물며 자기 지역에 먹을것이 없어서 타 지역으로 가족과 함께 잠시 이사를 가는 경우는 아예 허가가 나지 않음.
    왜냐하면 고을 백성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고을 수령의 업무태만에 따른 유랑민이 많아서라고 하여 수령의 인사고과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고을 수령들이 이주민에 대하여 철저하게 통제를 함.
    세종 4년(1422 임인) 한 겨울. 몇 해 동안 가뭄이 들어 평안·함길·강원·황해 등 각도에 굶주림이 심함.
    굶주린 백성들이 그나마 먹을것이 풍족한 전라도경상도로 늙은이와 어린애를 이끌고 식량을 구하러 가는 사람이 길에 줄을 이어 끊이지 않았다고 함. 워낙 대규모의 유랑민들이 발생해서 해당 고을의 감사(監司, 관찰사)수령(守令)은 유량민이 옮겨가는 것을 막지 못하고 통제 불능사태에 빠짐. 
    세종 임금께서는 국법을 어기고 유랑민 생활을 하는 것이지만 굶주려서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하는 것이 불쌍해서 임시로 유랑을 허용하게 됨. 아울러 유랑민이 이동해 가는 도(道)로 하여 모두 진제소(賑濟所, 임시 식량배급소)를 설치하여 그들을 진휼(賑恤)하며, 그들이 가는 대로 말리지 말게 함.  그래서 고향을 떠나서 떠도는 백성의 수는 비록 많았으나, 굶주려 죽은 사람은 적었다고 함.
     
    □ 세종 5년(1423년 계묘) 이 해에도 가뭄이 심한 모양임.
    세종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교하기를,
    “내 들으니, ‘임금이 덕이 없고, 정사가 고르지 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보여 잘 다스리지 못함을 경계한다.’ 하는데, 내가 변변하지 못한 몸으로 신민(臣民)의 위에 있으면서 밝음을 비추어 주지 못하고, 덕은 능히 편안하게 하여 주지 못하여, 수재와 한재로 흉년이 해마다 그치지 아니하여, 백성들은 근심과 고통으로 호구(戶口)가 유리(流離)되고, 창고도 텅 비어서 구제할 수 없다. 이제 정양(正陽)의 달[月]을 당하여 다시 한건(暵乾)한 재앙을 만나게 되었다. 조용히 허물된 까닭을 살펴보니, 죄는 실로 나에게 있다. 마음이 아프고 낯이 없어서 이렇게 할 줄을 알지 못하겠다. 행여 충직한 말을 들어서 행실을 닦아 화기(和氣)를 부를까 하노니,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은 제각기 힘써 하늘의 경계를 생각하여, 위로 과궁(寡躬)의 잘못과, 정령(政令)의 그릇된 것과, 아래로 전리(田里)의 휴척(休戚)과 백성들의 이롭고 병되는 것을 거리낌 없이 마음껏 직언(直言)하여, 나의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지극한 생각에 부응되게 하라.”라고 함.
    임금 스스로 잘한다고 하더라도 신하들이 버벅거리면 백성들이 많이 굶어 죽는다는 생각으로 발전하는 단계임.
    아버지 태종 임금은 가뭄이나 흉년이 들면 홀로 자책하는 스타일에서 크게 발전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세종 임금의 생각에는 가뭄은 임금 혼자 잘한다 하여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니 가뭄이 들면 좀 더 능동적으로 신하들을 굴려서 대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시는 모양임.​
     
    □ 어느날 이른 봄 가뭄끝에 비가 좀 많이 내린 모양임.
    “어제 온 비는 혹시 과하지 않았는가. 이른 봄에 비가 많이 와서 얼면, 아마도 보리가 상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하니, 모두 아뢰기를,
    “여러 달을 비가 오지 않아서 어제 온 비는 과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비가 많이 오는 것도 걱정 하심.
     
    □ 세종 임금 초반의 7년간의 가뭄이 거의 절정에 달하고 있던 세종 7년(1425 을사) 7월 1일
    궁궐 안에만 있기가 너무 답답 하셨던 모양임.
    가뭄이 너무 심하다. 소나기가 잠시 내렸으나, 안개가 끼고 흙비가 왔을 뿐이다. 기후가 순조롭지 못하여 이렇게 되니, 장차 벼농사 형편을 나가 보리라.” 하시고는 직접 도성 주변의 상태를 시찰 하시겠다고 함.
    하고, 드디어 서문 밖에 나가 두루 살피고 돌아와서, 대언(代言, 나중에 승정원 승지)들에게 말하였다.
    “금년 벼농사는 모두들 ‘꽤 잘 되었다. ’고 구라치더니, 오늘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오늘 본 영서역(迎曙驛) 홍제원(弘濟院)의 땅은 비옥한 편인가 메마른 편인가.”
    하니 지신사(知申事) 곽존중(郭存中)이 대답하기를,
    “이들 땅은 원래 메마른데다가 더구나 가물어서, 벼농사가 이렇게 잘못 되었습니다.”
    고 하였다. 영서 땅은 원래는 비옥한 땅인데, 곽존중이 임금이 근심하실까봐 메마르다고 대답한 모양임.
    이날 임금의 행차에는 따로 군사들을 부르지 않고 입번(入番)한 내금위 사금(內禁衛司禁, 경호원)만 거느리고 산(繖, 햇빛 가리개)과 선(扇, 큰 부채)은 쓰지 않고 단촐하게 나가셨음. 
    벼가 잘되지 못한 곳을 보면,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까닭을 물었고 아예 점심 조차 들지 않고 돌아왔다고 함. 

    7월 7일

    임금이 가뭄을 민망하게 여겨서 영돈녕 유정현(柳廷顯)·좌의정 이원·찬성 황희(黃喜)·형조 판서 권진(權軫)·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이조 판서 허조(許稠)·호조 판서 안순(安純)·예조 판서 이맹균(李孟畇)·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을 불러서 말하기를,

    “20년 이래로 이와 같은 가뭄은 보지 못하였는데, 생각하건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라, 감히 커다란 집에 편안히 있을 수 없어서 본궁으로 피하여 있고자 하나 더위는 혹심한데 군사가 있을 만한 곳이 없어서 그냥 이 궁에 거처하는 것이다. 궁중에 거처할 만한 곳이 세 곳인데, 내가 정전(正殿)에 거처하지 않고 바깥 측실(側室)에 가서 거처하면서 재앙을 그치게 할 도리를 생각할까 한다. 그러나 오히려 서이궁(西離宮)에 나가서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였으면 하는 생각인데, 어떠하냐.”라고 하심.
    가뭄들고 흉년인데 큰 궁궐에서 지내기도 미안해 하시는 모양임.

     

    □ 7월 9일

    세종 임금의 덕인지는 몰라도 얼마 있다가 비가 흡족하게 내림.​
    정부와 육조가 예궐(詣闕)하여 계하기를,

    “성심(聖心)이 하늘을 감동시켜 이에 비가 내리오니, 신 등이 기뻐서 하례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어찌 능히 비를 오게 하였겠느냐. 이것은 모든 신하들이 한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수양 반성하였기 때문이다.”
    정부와 육조에서 술을 올려 기력을 조양(調養)하도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세 번이나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본디 술을 좋아하지 아니하니 비록 마시지 않아도 좋으나, 매양 늙고 병든 경들이 이른 아침마다 조회할 때에 술을 내리고 싶었으나, 가뭄으로 인해서 실행하지 못하였던 것인데, 지금 경들을 위해서 그 청을 따르겠다.” 이날은 약소하게 임금과 신하들이 기분좋게 한잔 하심.

    □ 세종 12년(1430년 경술)

    호조에서 전라도 감사의 관문(關門, 보고서)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고창현(高敞縣)에 나이 8, 9세 된 계집아이가 있어 미친 병을 얻었는데 부모와 족친(가까운 친척)이 없사오니, 청컨대 양미(糧米)를 하루에 한 되씩을 주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아뢴 대로 하게 하고, 아울러 수령에게 일러 상시 보살피고 춥거나 굶주림에 이르지 않도록 하게 하였다고 함.
    놀랍지 않은가? 15세기 지구 동쪽 변두리 좁쌀만한 나라 조선의 전라도 지방 촌구석의​ 고아가 된 정신이상자 아이 하나의 싱태까지도 임금에게 보고가 되고, 보고 하는 관리는 그 고아에 대하여 하루에 겨우 쌀 한 되씩 무상지급 하겠다는 조치사항까지도 보고가 되는 초일류 엽기 복지 국가임.

     

    □ 재해가 발생 할 경우 임금도 물론 최선을 다해 정치를 하겠지만 신하들이나 지방관료들도 비상 상황임. 
    기근이 심할 경우 각 도에 경차관(중아에서 파견된 벼슬아치, 파견된 목적에 따라 임금의 백지 위임을 받는다.)을 파견. 백성들을 구휼하고 수령의 성적을 매김,
    만일 수령으로서 똑바로 업무를 보지 않고 백성들을 굶기는 자는 3품 이상은 중앙에 보고하여 임금과 중앙의 고위관료들이 처벌하게 하고, 4품 이하는 경차관이 직접 현장에서 볼기짝을 치는 등의 즉결처분을 내림.
    여기서 관찰사, 목사 등은 3품 이상이고 고을 현감 등은 그 이하임.
    □ 세종 5년(1423년 계묘)
    임강 고을의 현감(臨江縣監) 이명의(李明義)라는 자가 진제(賑濟, 구휼)하는 미두(米豆)와 장(醬)을 줄여서 착복하여 백성들이 굶주려 죽고 부종(浮腫, 굶어서 퉁퉁 부어 있는 상태)이 나게 하였다고 하여 형률에 의하여 곤장 1백 대를 맞을 위기임.
    세종 임금께서 고을 수령으로써 고생 많은데 곤장 1백대는 과하다고 생각 하셨나 봄,​ 60댜 만 차게 하심. 관직도 그대로 하게 하시고...
    (어? 이거 왜이러심?)

    이 장면은 세종 임금이 고을 현감을 두둔하는 장면이 아님.
    원래 어느정도 급이 되는 벼슬아치들은 아주 큰 중죄가 아니면 양반체면에 직접 매질을 당하면 안되니 매 값에 해당하는 재물을 벌금 형식으로 납부하고 매를 맞은 것으로 하는 "속장" 이라는 제도가 있음.
    그러나 고을 수령으로써 백성들을 굶주리게 하는 자는 이 속장 제도를 이용할 수 없고 실제 매를 무조건 맞아야 함.
    그리고 100대를 맞아야 하는 고을 수령을 60대 만 치는 이유는 100대 맞으면 죽거나 병신 되니까 60대 만 치고 다시 현직으로 복귀하여 다시 고을 수령을 해야 함. 그 다음에 또 같은 사건이 생기면 또 매를 맞거나 아니면 아예 영구 파직 되거나...
    한번 이런 처벌을 받은 고을 수령은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어금니 꽉 깨물고 백성들 살리러 다녀야 함.
    □ 충청도 도절제사(都節制使) 심보(沈寶)
    이 양반이 가뭄이 심하게 든 세종 5년에 정신 못차리고 사냥 하러 다님. 요즘으로 치면 메르스에다 경기 불황인데 골프 대회 연다던 그 분?
    신하들은 심보를 파직 시키라고 요구하나 심보는 ​풍산군(豐山君) 심귀령(沈龜齡)의 큰아들임. 심귀령은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태종 임금 때 끝발 날리던 양반이고 또 심귀령은 소헌왕후의 청송 심씨와는 사돈지간임.
    공신의 아들에 와이프의 사돈집안 사람이므로 파직까지 가지 않을수도 있던 사안임.
    그러나 뭐 공신이고 나발이고 세종 임금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논의한 후 심보를 파직 시켜버렸다고 함.
    (당시 도절제사는 보통 2품 이상 관리를 임명하며 해당 지역 병권의 책임자임.)​
    심보 할배는 파직 후 이렇다한 관직을 얻지 못하다가 몇 년 뒤에 쓸쓸히 돌아가심.
    ​□ 가뭄들고 흉년 오고 해서 고을 수령들이 세종 임금의 명령으로 많이들 뚜드려 맞고 쫓겨 나고 그러니 이게 형평에 안맞나 봄.
    의금부에서 임금에게 요청 하기를,
    황해·평안·강원 삼도의 감사(관찰사)들이 교지를 능히 받들어 행하지 못하여, 도내의 인민들을 많이 굶어 죽게 하였으니, 모두 이들이 백성에게 친근한 직책인데도, 수령은 죄를 논단(論斷)하고, 감사(監司)는 죄를 주지 않으니, 실로 불공평합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흠~ 맞는 말이군...!!!
    평안도 감사 성달생, 경력(經歷) 김간(金艮)강원도 감사 이명덕(李明德), 경력 고약해(高若海) 등을 모두 관직을 파면 시켜 버리고 역마를 타지 말고 개인말 타고 기름값도 각자 알아서 쓰고 서울로 올라와서 사직서 제출하라고 명령 하심.
    물론 굶주린 백성의 수가 적은 황해도 감사는 논죄하지 않으셨는데 당시 황해도 감사는 편산 신씨 신개(申槪)였음.
    이럴때 능력 발휘 잘하셨나 봄. 신개 할배는 나중에 좌의정까지 하심.​
     
    ​□ 보통 조선 시대에서 고을 수령이 반란죄 같은게 아니고 일반적인 뇌물죄나 고을의 곡식을 훔쳐 쓰거나 하면 파직 정도로 가볍게 마무리 되는게 관례임.
    세종 6년 평안도 지덕천군사(知德川郡事, 덕천군의 수령임) 최세온(崔世溫)​이라는 자가 관가의 물건을 훔쳐 쓰다 걸렸나 봄.
    처음에는 일반적인 관물을 도둑질 한 죄로 처벌 수위를 조절 하다가 나중에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 줄 진제미(賑濟米)를 훔쳐 사용한 것이 들통남. 더욱더 고을에서 굶주림으로 몇몇 백성들이 죽어 나갔나 봄,
    격노하신 세종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진제미(賑濟米)를 도적질하여 백성들을 굶어 죽게 하였으니, 다른 장물 먹은 관리와 비할 것이 아니다.”
    하고는 시원스럽게 무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베어버리심.
    다른건 다 참아도 백성들 굶겨 죽이는 고을 수령은 못봐주심.​

     

    □ 당시 조선의 지방 관리들의 인사고과의 기준 중에 가뭄이나 흉년에 지역 백성들이 타 지역으로 유랑 생활을 떠나서 인구수가 줄어들면 ​감점, 그리고 자기 지역에서 굶주림이나 전염병으로 사망자가 많이 발생 하면 감점이 됨. 아주 많이...
    보통 지역의 고을 수령들은 대규모 유랑민이 타 지역에 발생하여 그나마 형편이 괜찮은 자기 지역으로 그 유랑민이 흘러 들어올 경우 입장 거부 시켜 버림.​ 왜냐하면 타지역 백성이건 자기 지역 백성이건 관계 없이 자기 지역에서 사망할 경우 인사고과가 감점 되기 때문임.
    거주의 자유가 없던 조선시대이므로 일단 돌려 보내는 것은 법적으로 맞음.
    그러나 세종 임금은 이 경우에 때를 가리지 않고 돌려 보낼 경우 겨울철이라면 가다가 얼어 죽을수도 있으니 날씨가 풀리면 돌려 보내라 하심. 보낼때는 가다가 먹을 양식까지 무상으로 꼭 챙겨주라고 명령을 내림.

    ​□ 세종 임금 중반기까지는 수령이 흉년에 백성들을 제대로 구휼하지 못하면 속전(贖錢. 곤장을 맞아야 할 죄이나 곤장 대신 돈을 받고 매값을 대신함.)으로 처벌을 하였으나 후반으로 가면 속전 받는것을 금지 시켜 버림.

    그리고 처벌 받은 수령이 파직 당하는게 아니고 다시 그자리로 복귀 시켜줌. 잘 하면 승진 하지만 못하면 또 곤장 맞음.

    보통 현이나 군의 수령(현감,지사)는 곤장 60~70대, 그보다 직급이 높은 목사나 감사는 태형 50대 정도라고 함.

    그러니까 2품이나 3품 씩 되는 고의 관료들을 얼덩짝 벗겨 놓고​ 매질을 하는 장면이 벌어짐.

     

     

    ​□ 세종 26년(1444년 갑자) 5월
    경기도에 봄 가뭄이 심해 모를 심지 못한 고을이 여럿 발생함.​
    세종 임금께서 경기도 감사 이선(李宣)을 불러 문책하기를,
    “도내의 인민들이 어째서 기근(饑饉)을 당하게 되었으며, 파종은 어째서 시기를 잃게 하여 위임(委任)한 뜻이 이와 같단 말이냐, 전일에 조치한 상황을 모두 다 말하라.” 하니, 이이 이런 저란 변명을 늘어 놓았나 봄.
    ​빡친 세종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정부에게서 전월 20일쯤에 본도(本道)의 종량(種糧)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렸었는데, 경이 들은 바도 그때였으니, 경은 위임(委任)된 자인데도 어째서 늦게 들었는가.”라고 세세하게 따지고 듬.
    이선이 엎드려서 벌벌 떨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단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들을 시켜 이의 포치(布置, 긴급 상황에 대한 대처)한 상황을 힐문(따져 묻고)하게 하고, 인하여 이에게 이르기를,
    “경의 말을 들으니 경의 계획이 엉성하여 이에 이르렀다. 내가 백성들의 일에는 비록 가까운 족친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용서하지 않았으니,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굶어 죽는 일이 있으면 경을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어름장을 놓으심.
    이선은 태조의 서녀인 의령옹주의 아들임. 족보로 따지면 세종 임금에게는 숙부가 됨.
    아무튼 결국 이선은 파직 당했다가 집현전 출신에 임금의 족친이라서 그런지 몇 달 뒤에 복직 되었으나 별로 중요하지 않는 자리를 몇차례 옮기게 됨.​
     
    ​□ 세종 29년(1447년 정묘)
    봄 가뭄도 극심하고 그전해의 농사도 망쳐버린 평안도
    의금부(義禁府)에서 평안도 감사 권극화(權克和)지상원군사(知祥原郡事) 정포(鄭抱) 등이 흉년 구제를 잘못하여 약 60명 정도가 굶어서 부종(浮腫)이 났나봄. 이제는 고을 수령이든 관찰사건 이제는 가릴것도 없이 처벌 하라고 하심.
    권극화는 장성현(長城縣)에 무려 귀향씩이나 보내고 정포는 속전(贖錢)을 받지 말고 곤장 90대, 풀파워로 처벌하라고 하심.
    그런데 이 경우 처벌 근거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즉 반란죄 다음으로 큰 죄목인 임금의 명령불복종 죄임.

    요즘처럼 아이들 300명 씩 물 속에 빠트려 죽어나가게 했다면 그게 실수라도 조선시대 당시에는 고위직부터 실무자까지 수 십, 수 백명 목 따이고 귀양가고 곤장 처맞고 그랬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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