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애석하게도 가족은 나에게 좋은 안식처가 되어 주진 않았다. 다만 부모님은 좋으신 분들이라 이날 이때까지
부모님에게 받은게 없어서 고생한적은 없었다.
2. 아버지는 부모 복과 형제 복을 받지 못하셨던 분이 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은 각별했다고 했지만, 가난의 멍에로 공부를 제때 하지 못했고, 막내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 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위로 형제가 두분 있고, 누나가 둘, 아래로 여동생 둘이 있다. 그 중 위의 형제들과 아래의 막내 여동생은
가장 큰 멍에였고... 그들이 못한 일에 대한 책임을 대신 져야 했다.
아버지는 어릴 적 초등학교 대신 동네 서당같은데서 공부를 했다고 했다.. 다행이 형제들 중에서는 머리가 제일
영민해서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중학교도 보내고 계속 뒷바라지 해주려고 했다고 하는데..
나이 차이가 좀 나던 큰형들이 왜 장남 무시하고 막내인 저놈만 공부시키려고
하냐며 쌩 난리를 쳤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는 형제의 반대에 부딛쳐 중학교도 졸업 하지 못하고 사회에 나와야
했다고 한다.
큰형들은 망나니로 동네에서 유명했단다.. 부모들에게 손지검까지 하던 인간들이었단다... 계집질에 도박질에..
첫째 형은 월남 파병도 다녀오고 부산에 내려와 건설붐에 힘입어 기술을 익혀 일해...
집을 서너채 가질 만큼 떵떵거리기도 했지만, 사기와 아내의 야반도주로 빈털털이가 되었다. 가족들 건사도 못하고
충격에 쓰러진후, 고엽제 후유증까지 겹쳐... 혼자서 골방에 지내 연명하다 돌바주는이 없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주기적으로 찾아가 반찬이며, 밥이며 챙겨 주기는 했지만 24시간 돌볼 형편은 되지 못했다.
다만, 시골집에 맏겨진 조카들 학교보내고 사고친거 뒷수습 하는 게 아버지의 몫이었다. 조카들은 결국 등을 돌렸다.
둘째 형은 그나마 인성은 선했다고 하지만, 역시나 행실이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사기로 돈을 전부 날린 후..
먹고 살려고 중동에 갔다는데, 그곳에서 높은 곳에서 추락 당하고 운명하셨다고 했다. 당시 최고 책임자가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이었단다, 아버지는 이명박 친필 사인이 들어간 조문 편지를 받았던 것을 잊지 않으셨다.
그분 조카들도 역시 시골에 맏겨졌는데, 학교 보내고, 뒷바라지 하는 건 아버지 몫이 었다. 역시나 등을 돌렸다.
막내 고모는....... 남자 잘못 만나서 이래 저래 사고 치고 다녔고, 고모를 돌보고 사고 뒷수습 한 것 또한 아버지
였건만... 지금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인연 끊었다.
3. 먼가 비슷하지 않은가? 아버지의 업이 그대로 자신의 자식들에게 되 돌려진 것 마냥 아주 똑 같다...
아버지는 평생 자신의 형제들과 반목하고 휘둘린게 한이라고 했다. 그리고 화해의 의미로 자신의 조카들을 전부
사정상 입히고, 먹이고 키우진 못했지만, 학교라도 보내서 인간대접이라도 받게 해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카들 중 그걸 고맙게 여기는 애들은 하나도 없었고, 어쩌다 사고를 치거나, 아쉬울 때만 삼촌 하며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는게 다였다... 결국 등 돌리고 살게 되었고..
개중에 가장 정성을 들였던 한 조카는 집안 땅문제로 안좋게 끊어졌다. 수천, 수억원 하는 땅문제로 반목했으면
이해라도 할 수 있단다.. 그 때 싸웠던 땅은 시가로 해봐야 총면적 합쳐 계산하면 총 300만원도 안하는 임야란다.
그리고 그 땅에는 다른 것도 아니고, 집안 납골당을 지어서 그네 아버지 유골도 같이 모시려 했었는데,
그것도 이해 못해주고 돌봐준 삼촌한테 반목 하다니 그럴수가 없다며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가끔 하신다.
자기가 무슨 전생의 죄를 지어 그 많은 짐을 지어야 했나. 아버지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당했던 한 때문이었는지도
몰라도,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았고, 하다 못해 추석날 친척들이 벌이는 고스톱 판에도 눈길 한번 준적이
없으셨다. 돈문제 만큼은 철두 철미하게 했고, 늘 아끼고 조심하는데 신경을 쓰셨다.
자신이 젊을 때 형제들에게 발목이 잡히고, 자기 자식들 자랄 때, 조카들 뒷바라지 하느라 더 큰 집,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학교 보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올곧음에서 생겼던 문제였기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돈에 찌들리긴 했지만, 아버지는 한번도
자식들을 굶기고, 학용품을 사주지 못하고 공부를 안시켰던 적은 없었으니까....
내가 누나들과 화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도 이러한 이유가 있어서 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감당했던 그 업이..
자기가 낳고 기른 자식들이 그렇게 사는 것을 보고 뒤늦게 많은 후회를 하시는 듯 했다.
어릴 적, 자신의 모자랐던 가치관에 대해서도 후회를 많이 하신 듯 하다.
4. 어릴 적 아버지는 늘 신경질 적이고, 분을 잘 참지 못하시 곤 했다. 술을 드시거나 하진 않았지만, 한번 화를
낼땐 옆집에서 신고를 할정도로 아버지는 꾀나 히스테릭하셨던 분이셨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아버지는 많이 변하셨다. 내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아버지가 성숙해지는 모습을 많이
봤던거 같다. 한때는 집에 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안하셨던 분이셨는데, 어느새 집안 일의 대부분은 아버지 몫이었다.
집청소와 장보기 같은 건 아버지는 너나 구분 없이 하셨고, 성격도 많이 유순해 지셨다.
무뚝뚝함은 늘 한결 같았지만, 급한 일이나 지방에 일하러 가는 문제가 아니면, 늘 정시에 집에 들어 와서 집 정리를
하고, 어머니 대신 음식을 준비하고.... 아버지 나름의 방식으로 자식들을 돌보셨다.
가부장 적이면서도, 늘 솔선수범 했다. 먹는 것과 공부하는 것에 대한 뒷바라지 만큼은 부족하지 않게 도와주셨다.
사춘기때는 진로 문제로 아버지와 심각하게 다투긴 했지만, 내가 아버지를 꺾은 뒤로는 다른 방식으로 나와 소통을
하려 하셨다. 아버지는 늘 말은 없으셨지만, 행동은 늘 나와 누나들을 위한 행동을 하셨다.
나도 이런 아버지를 닮아서 인지, 말이 많지는 않다.
5. 어머니는 형제들이 많다. 남자형제가 둘이고 여자 형제들도 여럿이다. 생활에 쫓겨 왕래는 잘 하지 않고 있지만
형제들과의 사이는 꾀나 좋았단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기 형제들과 반목하며 지내는 모습과 자기 자식들이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모습을 보며 꾀나 힘들어 했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올바른 인성에 반해 결혼했지만, 그 꽉막힌 고집과 진절머리 나는 가족문제로 한때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이 들었다고 한다. 늘 돈에 찌들려 애들을 등에 업고 다니며 일을 다녔고...
60세에 은퇴하고도 손주들 뒷바라지 하고 사신다.
자기 자식들 두고도 조카들 뒷바라지 하느라 허리 휘며 산거, 맏며느리도 아닌데, 맏며느리 역할 하며 오만 제사
다 치룬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많으신 편이다. 사실 아버지와 애증의 역사를 함게한 장본인이시라 요즘은 아버지
를 구박하며 사신다고나 할까?
본래 잔소리도 많으시고......
6. 사춘기때는 사실 어머니와 사이가 좀 안좋은 편이긴 했다. 어머니는 잔소리가 많고, 조금 사람들에게 냉담한 편이기
도 했고.... 하지만, 나도 나이를 먹고, 내 자식은 아니지만 누나의 자식들.. 조카들을 겪어 보니 어머니의 삶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그냥 한 낯 인간이셨을 뿐이었다. 잘난거 하나 없이...
7. 어머니는 한때 불교에 심취 하셨던 적이 있으셨다. 절에 홀로 다니며, 경전에 심취하고, 스님들이 쓴 책들을 사다
시시 콜콜 읽으며 말해 주곤 하셨다. 그게 어머니 나름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탓인지 어머니와 얘기를 하면, 가끔은 화두를 던지시고, 풀이도 해주시곤 한다.
어릴 땐, 어머니의 잔소리가 지겹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는 늘 즐겁다.
먼지 모를 깨달음을 주실 때도 있다.
8. 어릴 땐, 나도 결혼을 빨리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멋 모를 땐, 사회에 나와서 될 수 있으면
빨리 돈을 모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서둘러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해가 지나며 나에게 쌓인 업보에 짓눌려... 감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랑은 늘 실패했고, 추억이라 할 만한 경험도 거의 전무 했다. 난 늘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했고, 사람에 의지 하면서도 불신했다.
사람과 사랑 이라는 단어는 나에겐 거의 동일시 되는 의미를 지닌 단어 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너무 멀게 느껴지는 단어였고, 내게 존재 하지 못하는 단어 같았다.
모든 걸 버렸다고 착각했다가.... 모든 것을 잃었다는 죄책감도 느낀다..
난 정말 혼자 살 수 없는 걸까?
9. 고등학교 때, 윤리 선생님이 내게 화두 같은 말을 던진적이 있다. 학교에서 수련회를 목적으로
산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날 따라 무언가에 홀린 듯.. 조용히 산을 올랐다.
중간에 좁은 길을 만나, 수백명의 학생들이 엉켜 길이 지체 됐었는데, 나는 그 무리에서 조금 벗어나
숨을 고르며 멀리 경치를 홀로 구경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누가 나를 강렬히 주시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윤리 선생님이었다. 윤리 선생님은 조금 괴짜였는데, 자기가 한때는 스님이 되려고 절간에 행자로 생활한 적이
있었단다. 결국은 포기하고 나와서 막노동 판을 돌며, 한때는 막노동으로 인생을 성공해 보이겠다며 호기도 부린
적이 있었단다. 그러다가 여차 저차 해서 선생이 되어서 윤리를 맡아 가르치게 됐다고 했는데,
수업도 그렇고, 과목도 그렇고 조금 괴짜 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특기 중 하나가 남의 관상을 보는
거라나?..... 그 날 따라 내 관상이 눈에 들어 왔단다.
나보고 대뜸...... ' 너는 중 팔자다. 중이 될 팔자다 ㅉㅉㅉ' 라고 하셨다.
지금까지는 중이 되지도, 중이 되려 해본적도 없지만,
어차피 이렇게 사는 삶이 중팔자가 아니면 먼가 싶기도 하다.
나는 나에게 떨어진 이 업을 견디기엔 너무나 힘겹고, 벗어날 수가 없다.
집안 종교도 불교와 가깝기도 하고..... 딱히 불교를 공부해 본적은 없지만.. 불교 특유의 염세적인 부분이
묘하게 내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다....
10. 조카들에게 느껴지는 죄책감이 나를 짓누른다. 그런 탓에 좋은 삼촌이 되기는 글러 먹은 것 같다. 아직 다큰 애도
세살이 채 되지 않았건만... 그 조그마하고 아직 인생 경험도 없는 아이들에게서 나와 누나들이 짊어졌던 업을
물려 받은 것을 보고, 너무나 많이 혼란 스럽다. 이 아이들에게도 이럴진데.. 내가 만약 자식을 가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과연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다만, 나도 사랑을 하게 되고, 가족을 일구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게 된다면, 행복해 질거 같다..
내가 부모가 된다면, 나의 업이 아이들에게 되물림 되지 않도록 하고 싶다.
11. 만약 내가 오늘 부터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올바로 변함없이 나아 간다면....
내 인생이 바뀔 수 있을까? 사람들과의 그 숱한 갈등들을 마주하고 해결할 수 있을까?
이 다음에 만나는 사람에게 만큼은 쉽게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로 살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면 그렇게 살아야 할 거 같다.
12.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제목에 죽음이라는 단어는 붙었지만, 난 죽음과는 아주 멀게 여기고 살았으니까...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는 명제 하에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 이라고, 처음에 이 의문스러운 말에 어리둥절 했었다.
대체 무슨 말이지? 죽음이 어떻게 발명 된거라는 거지?
가타부타 다 떨구고 결국 내가 이해 한 바로는 죽음을 상기하는 삶은 가치있는 삶에 충실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내일 당장 죽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쳐보자.. 단하루 남은 그 삶을 어떻게 쓰게 될까?
허투루 낭비하며 단 하루를 낭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바로 그점을 말하고 싶었던 거였다.
2. 나는 여태 인생을 지배해 본적이 없었다. 그저 시간에 휩쓸려 의지도 없이 대는 대로 살았다. 간혹 선택을
하기도 했지만, 그 선택 이후의 일들을 감히 감당해 내어 본적이 없었다. 겨우 겨우 턱걸이나 해서....
운이 따라주어 겨우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대부분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데로만 살았던거 같다.
죽음을 생각 하는 것 자체가 멀고, 나와 무관한 일이라 여겼다.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에겐 자살이라는
의미로 오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도 같다...
3. 인생을 주도해본적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늘 사람들
에게 휘둘리기만 했지, 그들에게 의미가 되는 사람이 되어 본적은 없었던 거 같다.
아니... 어려웠다. 타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역할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하다 못해 속편하게 남의 탓을 해본적도
별로 없었다.
4. 대학교 때 짧게 같이 자취를 했던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늘 남의 탓을 하고, 입에서 쉴새 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유없이 허공에다 화를 내거나 대화라도 할라 치면 꼭 누군가 한사람 뒷담화를 해야 속이 풀리는 이상한
녀석이었다. 결론적으로 난 이 친구와 친해 질 수 없었고 결국 싸우고 인연을 끊었다.
하지만, 내가 그 녀석에게서 부러웠던 점이 딱하나 있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겐 늘 관대한 그 태도, 절 때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되돌아 보지 않는 그 뻔뻔함.....
내가 감히 해보지 못한 그 행동들을 나는 아주 많이 부러워 했던거 같다.
5. 나도 남탓 좀 하며 살걸 그랬다. 친구들이 나를 괴롭히면 덤벼서 끝장도 보고, 군대에서 고마운 줄 모르고 힘을
휘두르는 그 인간들 뒷통수를 아주 지랄맞게 먹여 줄걸 그랬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타인을 기꺼이 사랑하는 것도
있지만, 나를 이유없이 미워하는 인간에게 그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6. 늘 그랬다. 늘 좌절하고, 상처 받아 주는게 당연하고 착한 사람의 일이라고. 그 악날함을 무시해 주거나 피하는
게 결국은 더 좋은 거라고... 그런데 막상 지금 이 삶을 뒤돌아 보니... 사소하게 쌓여 왔던 것들이 내 감정과
내 삶을 좀 먹은거 같다. 착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약자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나 스스로
약자로 몰아 놓고 거기에 순응해 살았다.
7. 인생을 살면서 늘 들어 왔던 말이 있다. "너만 가만히 있으면 일이 안 커진다. 가만히 있어라."
난 왜 속시원히 살지 않았을까? 정작 나쁜 놈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건 다 하는데...
8. 처음 얘기로 돌아 가보자. 이젠 되는대로 사는 삶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 마치 내일 당장 죽을 사람
처럼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나를 아끼고, 타인에게 좀 더 관대하고, 주어진 일들 보다 반드시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9. 사실 좀 많이 지쳤다. 손가락이라도 움직여야 하고, 머리라도 써야하는 일들이 있으면, 신경부터 곤두선다.
될 수 있으면, 누워서 처리 할 수 있는 일들은 누워서 처리 하고 싶을 정도다.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버거워 늘 사먹고... 오랜만에 오는 친구들의 연락은 너무 부담 스럽다. 간혹 모임이라도
있으면, 그 스트레스로 1주일은 피로에 흔들렸다. 당연히 조그마한 아르바이트 일 자리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10. 선택은 내가 해놓고, 떠밀리 듯 호주에 왔다. 나는 과연 잘해 낼 수 있을까?
아직은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글을 마지막으로 노력을 해 볼 생각이다.
일요일에는 성당에 가서 믿지는 않지만 신게 기도를 드려 볼 생각이다. 사실 절에 가고 싶지만, 이곳엔 절이 없다.
저를 좀 더 채찍질 해달라고..... 나 하나가 온전해 질 때, 사람들과 사랑을 내려 달라고..... 빌어 볼 참이다.
11. 내가 오래 동안 사랑했던 그녀에게서 여전히 연락이 없다. 나는 스위치를 켜고 끄듯이 쉽게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다만, 원치 않아 하는데 계속해서 맴돌수는 없는 일이다. 10여년 넘게 가까이 해왔고, 내 안에 찾이했던 부분이
너무 컸던 탓일까? 그 공백을 매울 방도가 없어 지금 이렇게 방황하는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도 오늘까지다.... 오늘을 끝으로 그만 슬퍼하고 힘을 내어 볼 생각이다.
12. 힘내보자..... 이게 나의 마지막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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